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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외길 걸어온 마흔다섯 해의 발자취공감공간 14 - 열화당책박물관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6.12.05 17:15
  • 호수 1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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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판도시에 자리한 '열화당책박물관'은 책의 가치를 가장 품격 있게 보존하고 있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어느덧 한 장밖에 남지 않는 달력을 넘기면 또 한 해가 ‘과거’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삶이란 쉼없이 흐르는 시간의 단위에 기억이라는 흔적을 얹어 창고에 차곡차곡 갈무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별다른 자취 없이 또 한 해를 보내는 심사는 여전히 헛헛하다. 이럴 땐 시야를 조금 넓혀, 나를 넘어 ‘우리’의 기억을 알뜰히 저장해놓은 공간을 찾아보면 어떨까. 파주출판도시 열화당 사옥에 자리한 열화당책박물관을 찾았다.

기쁜 만남이 이어지는 집

열화당(悅話堂)은 원래 강릉의 고택인 선교장(船橋莊) 안에 있는 사랑채 이름이다. 기쁠 열(悅)에 말씀 화(話), 가족이 한자리 모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연상되는 옛 건물의 당호를 출판사 이름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지어진 지 201년이 됐다는 선교장의 열화당은 지금까지도 지역의 작은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고, 1971년에 설립된 출판사 열화당은 미술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 분야의 책을 내며 당대의 독서인들에게 꼭 필요한 양서를 꾸준히 공급하고 있다. 이렇듯 ‘기쁜 만남이 있는 집’은 역사적 맥락을 이어오며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

열화당책박물관은 열화당의 물리적 자산과 정신적 자산을 함께 보존하고 전시하는, 책과 문화의 보물창고다. 이곳에는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평생에 걸쳐 모은 동서고금의 책 4만여 권이 소장돼 있다. 책박물관의 방문객들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내부 전시공간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사를 내뱉곤 한다. 1층과 2층이 시원하게 트인 전시실 벽을 따라 수많은 책들이 빼곡이 꽂혀있고, 2층의 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햇살이 바닥에 진열된 전시물들을 비추는 광경은 시각적 쾌감과 심미적 감동을 동시에 안겨준다. 현대적인 건축공간과 전통적 매체인 종이책이 어우러져 독특한 아우라를 빚어낸다고나 할까.       

열화당 발자취 깃든 창사 45주년 기념전시

마침 열화당책박물관에서는 창사 45주년을 기념하는 ‘열화당 마흔다섯 해의 자화상’이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열화당이 출간한 책들을 주제별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맨 처음 만나는 분야는 역시 열화당의 주 종목인 미술 관련 서적이다. 현대미술총서, 열화당 미술책방과 같은 시리즈는 우리나라 미술 출판의 전범이 되었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이론서와 작품집, 에세이들은 미술계의 토양과 담론들을 풍요롭게 살찌웠다. 고유섭과 김용준 등 우리나라의 박물학과 미술평론의 초석을 놓은 이들의 글을 모은 전집들도 눈에 띈다.

미술에 이어 사진, 건축, 한국의 전통문화 등의 주제를 따라 진열된 책들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다. 열화당의 책들은 종류와 내용도 다채롭지만, 책의 만듦새 자체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특히 단행본으로 기획된 자서전이나 작품집, 복간본 등에서 열화당 북디자인만의 매력이 한껏 발현된다. 전시된 책들은 자연스럽게 펼쳐볼 수 있고, 구매할 수도 있다. 다만 절판돼 희귀본이 된 책들은 아크릴 진열대 안에 놓여 귀한 대접을 받는다.

 

사진 작품집들을 모아놓은 코너. 기념비적인 책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제1전시장 안쪽의 만화 컬렉션은 대중들과의 소통 공간을 넓히려는 열화당의 또 다른 시도로 읽힌다. 세계 각국의 만화가들이 루브르박물관을 소재로 그린 루브르 만화 컬렉션,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을 만화로 재구성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시리즈는 책장을 펼쳐 본 방문객의 발길을 오래도록 한자리에 머물게 한다. 

 

열화당이 발간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만화 컬렉션 시리즈.  

 

제1전시장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인상 깊은 코너는 한쪽 벽에 마련된 ‘기억의 공간’이다. 작은 제단을 꾸미듯 벽 안쪽으로 파고 든 공간에는 책을 매개로 열화당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과 강릉 선교장에 거주했던 어르신들의 작은 사진들이 모셔져 있다. 책이란 결국 ‘사람’에 대한 인연과 기억이라는 사실을 제의적 경건함을 빌려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책박물관 한쪽 벽에 마련된 '기억의 공간'에는 위대한 정신과 예술혼을 보여 준 작가들의 작은 사진이 모셔져 있다. 

 

책과 예술로 엮은 아름다운 관계의 그물

건물 안쪽에 자리한 제2전시장은 오래된 책들의 아늑한 처소다. 동서양의 진귀한 고서들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고, 중앙에는 열화당이 초기에 만든 책들과 관련 자료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나이 지긋한 독자들은 이곳에서 젊은 시절에 탐독했던 책들과 재회하며 기억 저편에 접어두었던 오래된 꿈과 추억을 꺼내보기도 한다. 이기웅 대표는 조금은 장난스런 말투로 제2전시장을 ‘책들의 양로원’이라고 불렀다. 그의 역설적인 표현 속엔 현대의 숨가쁜 시간표에서 한 발 물러선 듯 보이는 책들의 곰삭은 가치를 옹호하는 자부심이 배어있다.

 

동서양의 오래된 책들을 모아놓은 제2전시실 전경. 

 

 

손바닥보다 작은 희귀본 성서.    

 

 

제2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오래된 책들.

 

이번 기획전에서는 흥미로운 연계 전시도 함께 연다. 열화당과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저자와 예술가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소장품들이 보따리를 푼 것이다. 전시 자료에 열거된 이름들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 예술의 지평을 개척해 온 이들의 면면을 망라한다. 민중미술가 오윤·홍성담·임옥상, 사진가 강운구·주명덕·김중만, 서양화가 방혜자·김혜련, 동양화가 장우성·문봉선, 건축가 김중업·민현식, 미술사학자 김원용·강우방, 북디자이너 정병규·안상수, 사상가 전우익 등등···. 존 버거를 비롯한 외국 작가들도 여럿이다. 토양이 척박한 우리나라의 문화생태계에서 열화당이라는 깊고 맑은 샘물이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갈증을 풀어주며 아름다운 관계의 그물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전시공간 곳곳에서 작가와 예술인들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우측 벽에 걸린 판화작품은 민중미술가 오윤의 작품.

 

전시도 관람하고 도서목록도 손에 넣고               

공간을 소개하는 코너지만 이번 주엔 전시 소개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열화당책박물관은 공간의 가치와 콘텐츠의 가치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열화당 마흔다섯 해의 자화상 전시는 올해의 마지막날까지 이어진다. 책박물관 지킴이 정혜경 학예사는 책과 출판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내공을 바탕으로 방문자의 관심에 부합하는 정보와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려준다. 제1전시장 2층으로 올라가면 편안한 휴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공간과 책들이 전해주는 감동을 음미할 수 있는 편안한 라운지도 마련돼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공간의 매력을 음미하기 좋은 제1전시장 2층의 라운지.

 

입구에서 한 권씩 얻어갈 수 있는 ‘열화당 도서목록 1971-2016’은 전시장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주어지는 근사한 선물이다. 표지 안쪽에 멋들어진 만화를 그려 넣은 도서목록은 만듦새도 내용도 영락없이 열화당답다. 집에 돌아와 열화당에서 들고 온 도서목록을 꼼꼼히 뒤적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인다. 읽고 싶은 책이 어디 한두 권이라야 말이지···.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열화당 도서목록' 뒤표지에 고양신문에게 띄우는 메시지를 적어 기자 일행에게 건네줬다.

 

열화당책박물관 기획전
열화당 스물다섯 해의 자화상 1971-2016

기간 : 12월 31일까지
장소 : 열화당책박물관(파주시 광인사길 25)
입장료 : 5000원
문의 : 031-955-7020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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