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조선 중기의 학자로 고양팔현에 오른 정지운(鄭之雲, 1509∼1561) 선생의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며 본관은 경주다. 어려서 김정국, 김안국 문하에서 수학했고, 동생 정지림(鄭之霖)과 함께 천명과 인성의 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도(圖)를 만들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해(天命圖解)를 만들었다. 이후 퇴계 이황의 감수를 받아 ‘천명도설’을 간행했다. 이것은 곧 이황과 기대승 간의 저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불러일으키며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퇴계의 묘갈명에 의하면 추만의 선대는 일찍부터 고양의 사포에 들어와 살았고, 추만의 증조인 정하는 통례원인의를 지냈으나, 조부 정한숙과 부 정인필은 모두 은거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추만은 2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 때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으나 지극한 효심으로 예를 다했다. 여기에 스승 김정국이 세상을 뜨자, 또다시 3년간의 심상(心喪)을 치르게 되면서 추만 형제의 가세는 극도로 기울어갔다.

추만 형제는 결국 학동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야 했고, 유교의 중요 개념인 천성과 인성의 문제를 보다 쉽게 강의하는 것이 목표였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주자학이 정도전, 양촌 권근 등에 의해 주도되면서 성리학적 이념체계가 국가사회를 지탱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다. 하지만 맹자의 인간 품성을 나타내는 인의예지의 사단(四端)과, 예기(禮記)에 인간의 감정을 좌우하는 희, 로, 애, 구, 애, 오, 욕으로 구분되는 칠정의 의미와 상호작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간의 이론은 ‘사단은 이(理)에 근원하고 칠정은 기(氣)에 기인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추만은 ‘사단은 이(理)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氣)에서 생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서 이른바 천명도(天命圖)를 완성시켰다. 이처럼 학동들을 위해 강의 교재로 만들어진 책자가 당시 홍문관 박사였던 하서 김인후에 의해 당대 최고의 석학인 퇴계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퇴계는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다’라고 수정하여 주었다. 추만이 이를 책자로 발간하자, 그의 명성은 곧 사해에 알려지게 됐고, 천명도설은 당시 선비들에게 최고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때 추만과, 퇴계의 주리론 중심의 논리에 반기를 들고 나온 인물이 고봉 기대승이다. 그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情)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와 기로 구분하는 것은 맞지 않으며, 굳이 정의 근원을 따진다면 이보다는 기가 중심이 된다는 주기론(主氣論)적 입장을 택하였다.

퇴계와 고봉 간의 논변은 장장 8년간 이어졌지만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인간 본성의 탐구라는 명분하에 조선 최대의 철학논쟁으로 비화되어갔다. 추만의 글자 한 자에서 촉발된 논변은 퇴계와 노수신의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과, 이이와 성혼 사이의 율우논변(栗牛論辨)으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동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퇴계와 율곡 간의 논쟁을 거쳐 조선의 정치사상과 오늘날 우리 한국인의 심성구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추만의 묘소는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고봉산 자락 선영에 있고, 위패는 문봉서원에 모셔져있다. 선생께서 오늘날 혼돈에 빠져있는 우리사회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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