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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와 화석정(花石亭)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전 건국대 교수
  • 승인 2017.02.13 14:40
  • 호수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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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이이(李珥, 1536~1584년)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법명은 석담(石潭)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불과 8살에 시를 짓고,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의 명성을 누리며,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유학의 거장이다. 하지만 율곡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사후 8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맞아, 그가 생전에 마련했던 대비책이 신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유불도 3교에 해박하였던 율곡은 화담 서경덕, 토정 이지함 등으로 이어오는 상수학(象數學)의 풀이로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할 수 도 있는 큰 전란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율곡은 자신이 죽기 1년 전 선조에게 ‘10만양병설’을 건의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삼사의 탄핵 받고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는 일, 주변의 사람들에게 때로는 비유적으로 또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향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대비책을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양병설에 반대했던 도승지 유성룡을 만나, 앞날을 내다 볼 줄 모르는 그의 무지를 꾸짖은 다음, 막 출사한 이순신이 ‘앞으로 나라를 구할 인물이니, 조정에 천거하여 중용하라’는 당부를 하고 고향 파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중의 종친이기도 했던 이순신을 불러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가 높이 난다(月黑雁飛高)’, ‘독한 용이 잠긴 곳에 물이 편벽되이 푸르다(毒龍潛處水偏靑)’라는 두보의 시 구절을 1000번 읽게 하는가 하면, 자신의 수제자인 백사 이항복에게는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를 싼 주머니가 좋다’는 등의 수수께끼 같은 말로 개인별 맞춤교육을 실시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되어 옥포, 당포 등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한산대첩과 명량해전에는 ‘쌍학익진법’으로 대승했다. 이순신이 최후로 전투를 벌인 노량해전이 있기 전날에는, 바다 물결이 유난히 고요한 것을 보고, 군사들로 하여금 칼로 뱃전을 두드리게 하고, 다음날 아침 배를 점검하자, 밤새 배에 구멍을 뚫으려고 잠입하였던 왜병들의 잘려진 손가락이 배 안에 가득하였다. 한편 명나라의 5만 지원병을 이끌고 평양성에 도착한 이여송이 왜군과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항복이 고춧가루 주머니를 차고 눈시울을 붉히자 마지못한 듯 참전에 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율곡의 선견지명이 가장 돋보인 것은, 자신의 5대조가 세운 임진강 변의 화석정을 중수하며 관솔을 재목으로 사용하고, 평소 하인들로 하여금 기름칠을 많이 해두게 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물밀듯 밀려오자, 선조 일행은 급히 한양을 빠져 나와 임진나루에 도착하였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무지 뱃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이항복이 위급할 때 보라며 율곡이 임종직전에 주었던 봉투를 열어보자, ‘정자에 불을 지르라’라고 쓰여 있었다. 율곡은 선조가 이 길로 행차할 것을 이미 8년 전에 알고 철저하게 준비하였던 것이다.
 
선조는 율곡을 말을 듣지 않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회한의 눈물을 뿌리며 무사히 의주로 몽진하였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임진왜란 직전과 같은 국내외적 혼란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난국을 극복하려는 사람보다,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사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 것은 단순한 나만의 기우일까. 임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화석정 난간에 서서 그때의 긴박했던 나날을 회억(回憶)해 본다.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전 건국대 교수  webmaster@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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