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전 건국대 교수
송설당(松雪堂,1855~1939)의 성(姓)은 최씨요,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경북 김천에서 아들하나 없이 딸만 셋인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송설당의 집안은 평안도 선천 부호군이었던 증조부 최봉관(崔鳳寬)이 ‘홍경래의 난’을 맞아 성(城)의 함락을 막지 못하고, 처가마저 난군에 연루되었다는 죄로 옥사하고, 4명의 자식들이 모두 전라도 고부로 유배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 최창환(崔昌煥)으로부터 이같은 집안의 내력을 전해들은 송설당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송설당은 주변의 성혼논의도 뿌리치고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상당한 재력을 갖추는데 성공하였다. 그녀는 6촌 동생 광익(光翼)을 부친의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고, 자신은 본격적으로 가문의 신원(伸寃)을 위해 나이 40세가 되던 해 상경하여 사대부들과 교제하던 중 엄비(嚴妃)를 만나고, 황태자 이은(李垠, 영친왕)이 탄생하자 그의 보모로 입궐하였다.

송설당은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괘불 무량수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을 한미산(노고산) 흥국사에 봉안하고, 만일기도를 주관하는 등 극진한 불심(佛心)으로 황실의 신임을 받았다. 1901년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몰적(沒籍)된 지 무려 89년 만에 조상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녀는 무교동에 쉰다섯 칸짜리 저택을 짓고, ‘송설당’이란 현액을 내걸었다. 송설당이란 이름은 이처럼 처음엔 당호였으나, 다음엔 당신의 호(號)로,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송설당은 황실의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공익사업과 빈민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명산대찰을 찾아 국태민안과 조상의 명복을 빌며 시주하였다. 1915년, 송설당이 삼각산 부왕사에 머물며 기도하는 동안, 동생 광익이 석공 이한모에게 의뢰하여 새긴 것이 바로 <崔松雪堂 弟 光翼 乙卯>이다. 이같은 암각서는 경북 김천 청암사, 경남 창영 도성암 등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있고, 금강산에도 대형 암각서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송설당은 광익의 맏아들 석태(족보명: 석열)에게 평안도 정주와 선천지역에 흩어져 있는 조상들의 선영을 찾아 제(祭)를 올리게 하고, 자신은 고양시 고양동 목암리에 소재한 13대조 훈(壎, 교하현감), 12대조 세준(世俊, 병조좌랑), 11대조 영경(永慶, 대사헌), 여경(餘慶, 호조참의) 형제의 묘소 등 3대 조상들의 선산에 석물을 주문하며, 가문의 현창(顯彰)사업을 빠짐없이 마무리 하였다. 하지만 송설당에게는 모친께서 “너의 재산을 육영사업에 쓰라”는 유언을 실천할 마지막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송설당은 종교적 동지인 만해 한용운, 김천의 유지 이한기 등과 상의하여 당시 경북 북부지역의 숙원사업이던 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등학교) 건립에 전 재산 32만원을 쾌척하였다. 개화기와 근대라는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여성으로서 최대의 부를 누렸지만,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는 숭고한 순간이었다. 또한 송설당은 조선왕조 최후를 장식한 최고의 여류시인이었다. 그녀가 남긴 60편의 가사와 260수의 한시는 후학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사학을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는 그녀의 외침은 사후 8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북한산 부왕사지 입구에 있는 최송설당을 기념하는 암각서. 3월 11일 고양신문 산악회가 방문 답사하며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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