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이제야 커밍아웃한다. 나는 여성이다.

내가 여성분들과 더불어 인문학 강의를 할 때,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여성분들은 나를 남성으로 취급하지 않은 듯하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자연스럽게 남편을 욕하고 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나는 그때 여성이 분명하다. 그게 자연스럽다. 어디 나뿐이랴.

농사를 지을 때, 누구는 힘차게 땅을 일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누구는 섬세하게 땅을 고르는 사람이 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무를 구해다가 푯말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농장에서는, 그곳이 남성만 있는 농장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분명 남성과 여성이 같이 있다.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개의 성이 공존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옷감에 물들듯이 서로 스며든다. 상황과 상태에 따라 우리는 여성이 되기도 하고 남성이 되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우리는 단일한 성을 사는 것이 아니라 N개의 성을 살고 있다고, 우리가 성을 이야기할 때 섹스(sex)라는 선입견이 개입될 수 있는 단어보다 젠더(gender)라는 중립적 언어를 선택하는 것도 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최근 『타임즈 』에서는 ‘‘그’와 ‘그녀’를 넘어서’라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남성을 지칭하는 ‘그(he)'나 여성을 지칭하는 ’그녀(she)' 대신에 중립적인 대명사를 고안하려는 언어적 노력을 소개한다.

이러한 언어적 노력은 ‘이성애’에 기초한 언어가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기 힘들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SNS의 대명사가 된 페이스북은 성유형을 60가지나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성애에 기초한 성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불관용이 지배적이지만, 이제는 성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사유를 해야할 때가 왔다.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약자로 LGBT로 불리는  성소수자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워야할 윤리의 기초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태도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현존하는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의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헌법은 성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 성에 반드시 여성과 남성만 포함시켜야 하는가? 성차별 금지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성적 존재에 대한 차별을 금지해야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을 혈액형으로 구분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A, B, AB, O 등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이 미신에 가까운 것이라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인간을 성격과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미신이 아닐까?

가장 오래된 고전인 『 주역 』에서도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으며, 음이 변하여 양이 되고, 양이 변하여 음이 되는 역동적 사유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말인 즉, 우리는 여성이자 남성이며, 남성이자 여성이고, 남성이 된 여성이며, 여성이 된 남성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이성애자이자 동성애자이고, 양성애자이자 무성애자이며, 게이이자 레즈비언이고, 시스젠더이자 트랜스젠더다. 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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