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의 이야기>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고양신문]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권력창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공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

백과사전에 정리된 시민의 정의다. 시민이란 단어 자체에 시민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담겨 있다. 촛불항쟁과 대통령 탄핵사태를 지켜보며,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점은 시민다운 시민이 우리 사회 곳곳에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아무리 민주적인 정부라 해도 역시 시민이 방치하는 순간 스스로 절대 권력인 듯 오만해질 수 있다. 고양신문은 이 깨달음의 가치를 지역사회에서 살려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자 한다. 먼저 가까운 주변에서, 삶의 현장에서 시민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어떤 시민’에게 다가가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경청’부터 시작한다.

첫 번째 ‘한 시민’은 평생 시민에 대해 연구하며, 시민다운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학자 박영신 교수다. 주엽동에 살고 있다. 대선이 치러진 다음날인 10일 저녁 아람누리도서관에서 몇몇 시민들과 함께 박영신 교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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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주엽동에 거주하는 고양시민이다.

올해로 80세,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만만찮은 인생을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자기의 정체성을 짧은 시간에 소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무척 복잡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정체성이 스스로에게도 명확히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왜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는 걸까? 참으로 길고도 오랜 질문이다. 비슷한 상황에 던져진 두 인간이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미국 출신의 한 철학자는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경험하고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독일 출신의 한 신학자는 똑같은 악몽의 역사를 겪고 나서 유신론자가 되었다. 동일한 역사의 경험이 완전히 다른 영향력을 미쳐 다른 삶을 살게 만든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똑같은 사회적 환경 안에서 다양한 인생이 나타나는 이유는 과연 뭘까.

자라면서 어려운 사람 향한 관심 교육받아 

질문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겠다. 내가 지금의 나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떤 집안에서 어떤 삶의 가치를 교육받고 성장했나를 살필 수밖에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향해 늘 관심을 가지며 사는 것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돈이나 권력이나 좋은 학교보다는 어려운 사람을 벗하며 사는 삶에 가치를 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공부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회학을 전공해 대학 선생이 됐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이어갔다.

학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정을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마쳤다. 개인적으로 결과보다는 가치를 강조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중심에 둔 교육을 받은 것이 참 좋았다. 대학 시절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도 했다. 

대학 과정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채플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 형식으로 드리는 채플 시간에는 존경할만한 인사들이 연단에 오르곤 했다. 사실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 후에 입학한 대학의 교육 과정은 지금에 비해 무척 엉성하고 열악했다. 하지만 채플 시간만 되면 토착적 기독교 사상을 펼친 함석헌 선생과 같이 빛나는 연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제 강탈기에 우리말과 글을 지키며 민족운동을 벌이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은 분이 연사로 나와 불의한 힘에 타협하지 않고 옳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주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원칙 있는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배울 수 있었다. 영문학 개론이나 국어학 개론 시간에 들을 수 없는 귀한 가르침이었다.

미국유학 중 반전운동 경험하며 생각의 틀 깨져 

군 생활을 마친 후 석사 끝내고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는 돈이 없고 배움을 이어갈 방법이 없는 이들이 해외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아 외국 유학을 갔다. 다행히도 나도 그런 기회를 얻게 되어 1966년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내가 목격한 미국 사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월남전 반대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월남에 파병을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월남전은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성스러운 전쟁이었다. 나 역시 일말의 의심도 없이 철저한 반공주의로 무장한 청년이었기에, 미국 사회에서 목격한 월남전 반대 운동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는데, 시위 장소에 나가 보고 생각이 깨지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앞장에는 대단한 인사들이 등장하곤 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유명한 극작가인 아서 밀러가 반전 연설을 하기도 했고, 명문 대학의 교목이 월남전 반대운동 연설을 하다가 실정법으로 붙들려갔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다. 한국에선 너무도 당연하고, 옳고, 질문 자체가 봉쇄된 물음들이 이곳에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에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익 포기하며 타인의 자유 옹호하는 모습 인상적

그러다가 학교를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옮겼다. 새로 찾아간 학교는 당시에 유행하던 청년들의 반문화 저항운동의 센터와도 같은 곳이었다. 우선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여성들이 앞장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교실이나 캠퍼스에서뿐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고, 교제하고, 생각하는 방식 하나 하나에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고 권리가 똑같다는 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물질문명을 거부하며 대안적 삶을 꿈꾸는 히피들의 반문화운동이 활발했는데, 그들이 대학 부지 안에 텐트를 치고 공동체를 만들어 살았다. 대학 당국으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내쫓기 위해 학교에 주차장과 기숙사가 부족하니 주차장과 기숙사 짓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 운동을 펼쳤다. 히피들을 내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반문화운동을 펴는 이들의 자유를 포용하고 그들의 권리를 앞장서서 지지해주는 학생들을 보며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자족하는 삶 보다는 나눔의 삶 추구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에서 어떤 운동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여성해방, 그리고 환경과 지구의 생태 문제에 힘을 보태기 위해 노력했다. 학생들에게도 옳은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환경운동을 펼치는 시민단체인 녹색연합과 선이 닿아 1999년 녹색연합에 들어가서 공동대표를 거쳐 상임대표를 역임하며 열심히 일했다. 지금은 녹색연합의 자매기관인 (사)녹색교육센터의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고양시민이 된 건 15년 전이다. 몇해 전에는 내가 살아가는 동네의 밑바닥 자치 활동을 경험해보고 싶어 내 발로 주민센터를 찾아가 면접을 봐서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이 됐다.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한 2년의 시간 동안 동네의 풀뿌리 조직이 돌아가는 것을 관찰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상이 한 시민으로서 살아온 박영신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호수공원을 돌고 바람소리를 듣고 하늘을 바라보며 나 혼자만 편안하게 만족한 삶을 누리는 것을 넘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의미 있지 않겠는가. 나보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과 나의 삶을 나눴으면 좋겠다. 그렇게 남을 바라보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은퇴가 없다. 아무도 시민으로서의 내 삶을 그만해라 할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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