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장

역사의 큰 줄기를 잇는 것은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여 진 작은 시간들이다. 개개인이 지역의 문화와 풍속을 보존하는 것은 작은 시간을 통해 이뤄지지만, 유구한 가치를 지닌 우리 역사의 큰 줄기를 돌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고양은 강직한 선비가 즐비한 고장이었음이 많은 역사 기록을 통해 입증 되고 있다. 많은 선비들 중에서도 특히 공인으로서 역할을 신념을 가지고 수행했고 자연인으로서의 인품을 갖춘 자랑스런 고양인 송강 정철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송강 정철(536~1593)선생께서는 26세에 진사시에 장원,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관찰사와 예조판서, 좌의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 체찰사로 관군과 민병의 전쟁수행을 독려하였으며, 삼경(한양·개경·평양)이 수복되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1593년 12월 18일에 강화도에 우거 중 작고하셨다.

 송강 정철은 이상 세계의 실현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뿐만이 아니라 한글로 된 시조 76수와 한시 758수와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등 가사 4편과 사설시조인 장진주사 1수와 산문 427편이나 되는 걸작을 남겨 시성이라 일컬을 만한 시인이요, 대문호로서 추앙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가사를 문학의 한 장르로 완성시킨 문인으로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분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시풍은 호탕하고 비장하며, 가사와 단가에서는 한문 투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우리말과 글을 구사하여 한글을 가장 아름답고 쉽게 널리 펼치신 시가문학의 대가이시다.

 우리 고양에는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많아 남아있다. 그곳 중 하나가 고양의 신원동에 있는 송강 마을이다. 송강은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했고, 왕성한 작품구상을 하며 사시던 곳도 송강마을이다. 또한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남원의 기생인 자미(紫薇)를 사랑하자 세상 사람들이 자미를 송강의 강자를 따서 ‘강아’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강아는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어 소심보살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하다가 송강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했다. 송강의 유택을 진천으로 이장한 후에도 아끼던 강아의 묘는 그대로 남아있어 마을 사람들은 ‘강아아씨 묘’라고 애정을 담아 부른다.

 우리에게 ‘지식’은 현재 그 자체가 ‘생존경쟁’의 무기이며 경제 활동의 매개가 돼버린 점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선비 송강은 ‘지식의 공적 기능’을 충실히 발휘했다. ‘지식인의 공공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많은 시가문학 작품을 남기셨던 것이다.

 송강의 투철한 충효사상과 공선사후 원칙에 입각한 공복정신을 기리고, 시가문학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제15회 송강정철문화축제’를 5월 26일 덕양구 화정역 광장에서 개최한다. 이날 시민들은 축제를 통해 다양한 전통문화공연, 송강가사의 탁본체험, 전통연 체험을 할 수 있으며 막걸리를 무료로 시음할 수도 있다.

 역사가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훌륭한 역사를 가지느냐의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얼마만큼 잘 보존하고 계승발전 시켜 나가는데 있다고 한다.

 고양시는 급격한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도시와 농촌, 전통과 현대가 서로 어우러진 새로운 개념의 미래형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고양의 역사인물들은 유무형의 가치창조의 원동력으로서 존재하기에 송강 정철의 삶과 발자취 또한 재조명 해 봐야 한다.

아름다운 고양의 광장에서 파란 하늘과 녹음을 벗 삼아 고양시민 여러분들과 함께 송강 선생의 숨소리를 듣고자 한다. 고양시는 전통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과 더불어 지원을 늘려야 할 때다.

안재성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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