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에서 가장 오래된 ‘향미용실’

[고양신문] 꼬부랑 할머니가 미용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오니 낡은 소파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들이 두런두런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오늘 교회에서 급식하냐?”고 묻는다. 이 동네로 오신 지 얼마 안 되는 할머니가 무료급식 정보를 얻고자 들어오신 것이다. “차로 모시러 오니 기다리셨다가 같이 가자”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소파에 걸터앉는다.

향미용실은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신 마을의 할머니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휴식장소이고, 심심한 할머니들이 말벗을 찾아 오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거울 앞에서 짧은 머리를 퍼머하는 할머니도 말할 틈만 나면 이야기에 끼어들곤 한다. 간밤에 꾼 불길한 꿈 이야기, 밭에 가려고 차를 타다가 넘어진 이야기, 어디가 어떻게 멍이 들었는지 소상히 이야기를 하신다.

뭐 하러 농사는 짓느냐고,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교회 열심히 다니더니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듣는 할머니들도 기회만 생기면 제각각 이런 저런 대꾸들을 하신다. 원장할머니마저 고객의 머리를 만지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아 미용실 안은 마치 수다스런 라디오방송을 틀어 놓은 듯하다.

향미용실은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미용실로 손꼽히는데, 덕은동에서 요리조리 자리를 옮기며 미용실을 운영해온 지 어느덧 49년째다. 오랜 세월의 향기가 묻어나는 향미용실은 영화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다. 정계자<사진> 원장은 “신성일의 아들(배우 강석현)이 나오는 영화를 찍는다고 밤에 횃불을 켜 놓았는데 초상난 줄 알고 밤새 전화가 왔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준다.

정 원장은 투철한 직업의식을 칭찬받아 대한미용사협회에서 표창장도 받으며 고양시 최고령 미용실인 향미용실을 개점 때부터 운영하고 있다. 어릴 적 언니가 머리 한다고 미용실에 간다길래 호기심에 따라갔다가 미용 기
술을 배웠다는 그는 결혼 전 미용업을 시작했는데, 결혼 후 일을 쉬었다가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젊은이들이나 아이들은 할머니미용실에 가기 싫다고 하는데 어르신들은 이렇게 꾸준히 찾아와주시고, 때로는 맘에 안 들어도 ‘이만하면 됐다’며 이해해주시고, 먹을 것 있으면 싸와서 함께 나눠 먹는 이곳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 며느리는 욕심이 없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시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욕심 없이 살아온 정계자 원장은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후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살게 됐다”고 한다.

정 원장은 “옛날 부조금이 5000원하고, 쌀 1말이 6000원 할 때 컷트가 1000원이었고 퍼머가 2만원이었는데 지금도 할머니 고객들께서 쌈짓돈 주시는대로 2000천원도 받고 3000천원도 받는다”면서 “욕심 없이 사니 발전이 없다는 주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이웃들과 좋게지낼 수 있다는 걸 안다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희를 훌쩍 넘긴 정 원장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는 한 할머니 손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여기가 없으면 우리가 어디로 가나?”라며 애정 듬뿍 담긴 눈길로 거울 속 원장의 얼굴을 쳐다본다. 할머니들은 “옛날에는 여자들이 우물가에 모여 수다를 떨었는데, 덕은동에는 향미용실이 있어 지금도 동네 소식을 다 들을 수 있다”며 향미용실의 존재를 고마워했다.

손 뻗으면 닿을 듯 낮은 천장과 희뿌연 거울들이 정겨운 향미용실에서 정 원장은 손님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이웃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