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문학과 사상』 펴낸 엄혜숙 작가

권정생 타계 10주기를 맞아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서를 펴 낸 아동문학연구자 엄혜숙씨.


[고양신문]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의 작품을 남기며 아동문학의 넓이를 확장했던 고(故) 권정생(1937~2007)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권정생의 문학세계를 깊이 있게 재조명한 책이 출간됐다. 아동문학연구자인 엄혜숙씨가 쓴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은 권정생의 작품 속에 깃든 사상적 측면의 실체와 변모과정을 시대별로 꼼꼼하게 짚어낸 연구서다.

책을 쓴 엄혜숙씨는 기획·편집자이자 번역가로 활동하며 아동문학서적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동시에 아동문학연구와 평론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들을 쌓아왔는데, 이번 책은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 온 권정생 연구의 중간 결산이다.

20여 년간 장항동과 화정동에 거주해 온 고양시의 이웃이기도 한 엄혜숙씨는 “2000년에 권정생 연구와 관련한 첫 글을 썼는데, 무려 17년이 지나 비로소 한 권의 책이 나왔다”며 자신의 신간을 “게으름뱅이의 책”이라고 소개했다. 엄혜숙씨를 마두역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나 새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새로 출간한 책을 ‘게으름뱅이의 책’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뭔가.

아동문학 기획과 번역 일을 하다가 2000년에 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첫 학기에 ‘문학과 사상’이라는 과목을 들었다. 그때 지도교수인 최원식 교수로부터 “위대한 문학작품에는 대개 죽음에 대한 사유가 깔려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권정생 선생의 작품이 떠올라 그와 관련한 리포트를 썼다. 2006년에 리포트의 내용을 보완해 ‘인하어문’이라는 학술지에 게재한 글이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기독교·아나키즘과 관련하여’다. 2010년에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확대해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님의 10주기를 기념하며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그림책에 대한 내용 등을 추가해 비로소 책으로 묶었다. 한 편의 리포트가 씨앗이 돼 시작한 연구를 17년 만에 책으로 낸 셈이다. 작가로서 아주 게으른 점을 반성한다(웃음).
 

엄헤숙 선생의 권정생 문학 연구의 궤적들. (왼쪽부터)2006년 인하어문에 게재한 원고, 2010년 박사학위 논문, 최근 발간한 신간.


■ 책은 권정생 작품에 깃든 사상적 변모과정을 다룬다.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강아지똥’을 비롯한 동화들을 썼던 초기(1969~1980)에는 기독교 실존주의가 사상의 바탕을 이루며 ▲‘몽실언니’, ‘점득이네’ 등 소년소설을 썼던 중기(1981~1990)에는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확대되고 ▲‘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밥데기 죽데기’와 같은 판타지 작품을 선보인 후기(1991~2007)에는 생태 아나키즘이 두드러진다. 세 가지 경향은 기독교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권정생의 사상이 확대되고 성숙돼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권정생에게 기독교는 무엇이었나.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보면 두 차례의 전쟁(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참혹한 성장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가 폐병을 앓게 된 것도 못 먹고 못 입어서다. 어린 권정생에게 교회에서 본 십자가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0대 시절 의지가지없이 걸인처럼 떠도는 동안 권정생은 오히려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안동의 한 작은 교회의 문간방에서 종지기 노릇을 하며 삶을 의탁한다. 기독교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쓰여진 초기 작품들을 보면 손에 난 못자국이라든지 낙원에 대한 이야기 등 기독교적인 모티프가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강아지똥’만 하더라도 스스로의 존재를 소멸시켜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주제가 예수의 죽음으로 인간을 살린다는 맥락과 이어지지 않는가. 한 마디로 동화작가라기보다는 실존적 신앙 고백으로서의 문학이었다고나 할까.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느끼던 강아지똥이 자신을 녹여 민들레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는 ‘하물며 인간인 나도 다른 존재를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종교적 결단으로 읽힌다.

■ 단계별로 조금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우선 초기 기독교 실존주의부터.

쉽게 말해 기독교에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처럼, 어떤 존재가 죽음의 절망을 벗어나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권정생은 결핵을 심하게 앓으며 ‘세상을 뜨기 전에 이 작품 하나 남기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강아지똥’을 쓴 것 같다. 그래서 원본에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 훨씬 짙게 드리운다. 그는 죽음의 절망이 생명의 희망으로 역전되는 부활의 종교인 기독교 구원사상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다. 가장 약하고 천한 존재는 권정생 자신이기도 하고, 예수이기도 하고, 예수가 구하고자 했던 보잘 것 없는 하층민들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 운명적으로 죽음에 붙들려 있는 인간에게 신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사유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도 느껴진다.

■ 기독교 아나키즘에 대해 설명해달라.

기독교 실존주의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 제도의 권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확장된다. 권정생은 신앙인으로 평생을 살지만, 현실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정신은 성서 속에 면면히 흐르는 ‘예언자 사상’에 기반한다. “예수는 교회에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삶속에 함께 한다”는 그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톨스토이의 사상을 연상케 한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구두장이 마틴’이라는 작품을 보면, 신이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주인공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는데, 권정생 선생의 ‘오두막 할머니’에서도 주인공 할머니가 떡을 만들어 교회 밖의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나온다. 함석헌이나 김교신 등 그가 사상적 스승으로 삼은 이들은 물론, 살아생전 그가 교류한 이오덕, 최완택, 이현주 등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사상적 지평 역시 기독교 아나키즘이다.

■ 후기 사상으로 거론한 생태 아나키즘이란.

인간의 경계를 넘어 세상의 모든 생명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태도가 생태 아나키즘이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을 대표적인 생태 아나키스트라 부를 수 있고, 시인 신동엽의 작품에도 이런 경향이 유사하게 드러난다. 생태 아나키스트들은 기본적으로 농사를 중시한다. 농사는 문명적 생산성의 반대쪽에 서 있는, 신과 자연의 원리에 의한 노동과 생산이 아닌가. 권정생의 작품을 읽다 보면 생태주의적인 관점에서 존재의 순환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살아있는 존재가 거름이 되고, 거름은 새로운 생명을 피어나게 하는 순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죽음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앞머리에 ‘좋은 문학작품에는 죽음의 문제가 깔려 있다’고 말했는데, 권정생 작품에서의 죽음이야말로 희생을 넘어, 세상 전체에 깃든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 권정생 선생의 아동문학사적 가치나 의의는.

권정생은 이야기가 말로 전해지는 구전시대와 글로 전해지는 문서시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같은 존재다. 입말과 글말은 굉장히 다르다. 그는 논리적인 이론을 배운 이들과는 달리 말랑말랑하게 전달되는 입말을 잘 사용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의 미학적 측면을 자양분 삼은, 마을공동체 이야기꾼의 마지막 세대라고나 할까. ‘몽실언니’나 ‘한티재 하늘’도 플롯의 강박에서 벗어난 이야기 모음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교육을 못 받은 사람에게도 그의 이야기는 무척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 권정생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읽혀야 하는 이유는.

권정생은 기본적으로 문명비판적이다. 시대의 욕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위대한 작가의 태생적 사명 아니겠는가. 권정생은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증언한다. 과학기술문명을 무작정 배척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의 생명과 시간을 팔아서 물질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비정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권정생은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삶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준다.

■ 권정생 작품을 읽고자 하는 신세대들에게 팁을 준다면.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선생님의 후기 작업인 ‘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나 ‘랑랑별 때때롱’, ‘밥데기 죽데기’ 등의 작품을 먼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굉장히 해학적이라 요즘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다. 선생님의 초기작만을 읽은 이들이 권정생의 이야기는 너무 슬프고 우울하다고만 생각하는데, 중기와 후기 작품중에는 유머러스한 작품들이 많다. 권정생은 기본적으로 유머 감각이 있는 분이다. 그리고 조금 자라서, 시대와 결핍을 사유할만큼 되었을 때 몽실이 전쟁 이야기는 가난 겪은 세대가 공감할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을 듯 하다.

■ 권정생 연구와 관련한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권정생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 된 ‘강아지똥’의 원본 연구를 하고 싶다. ‘강아지똥’은 한 월간지(기독교교육)의 창작동화공모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지만, 발표된 분량보다 훨씬 긴 원작이 있었다. 원작에는 겨울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대한 이야기 등 죽음에 대한 더 깊은 실존적 사유가 담겨있다. 궁극적으로 언젠가는 ‘권정생 평전’을 쓰고 싶다. 평전이야말로 한 작가에 대한 문학과 사상, 그리고 시대를 아우르는 연구의 집대성이 아닌가.

■ 권정생 연구를 하는 동안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논문을 마무리할 때 석 달 동안 고시원을 잡아 출근하며 글을 썼다. 나야 낮에 글을 쓰고 저녁때 집에 들어왔지만, 많은 이들이 고시원을 마지막 삶의 공간으로 삼아 낮에 일하고 밤에 잠을 자러 들어오더라. 청년들의 열악한 현실과 밑바닥 서민들의 고달픈 삶의 모습을 본의 아니게 들여다 본 경험이었다.

세상을 뜨기 몇 해 전 안동의 자택에서 찍은 권정생 작가의 모습. <사진=류우종, 제공=김윤용>
세상을 뜨기 몇 해 전 안동의 자택에서 찍은 권정생 작가의 모습. <사진=류우종, 제공=김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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