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화제가 잇따르고 있다.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행보와 정의로운 역사인식에 대한 시민의 환호라 할 법하다. 물론 장관임명을 둘러싸고 야당과 갈등을 빚고, 준비된 대통령이라 했지만 후속인사가 발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럼에도 지난 보수정권에 절망한 시민은 이 정도의 개방적인 태도만으로도 안도하고 환영한다. 특히 대통령 집무실을 비서동으로 옮겨 참모진과 늘 소통하고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는, 탄핵당한 대통령과 비교되며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소식을 처음 전한 언론은 비서동이 본디 여민관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때 위민관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아마도 명칭에는 변화가 없을 듯하다고 했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면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맹자』를 열심히 반복해서 읽어본 사람으로서 ‘위민’과 ‘여민’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위민’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관계의 수직성이 전제되어 있다. 통치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백성을 위한답시고 시혜를 베푸는 척하는 마음이 스며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민’은 수평적 관계를 전제한다. 군림하거나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겪는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맹자』에 보면 위민의 대표격으로 양혜왕이 나온다. 나라에 흉년이 들면 주민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노약자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는데, 왜 인구수가 늘어나지 않느냐고 맹자에게 푸념한다. 얼핏 보면 양혜왕이 선정을 베푼 듯 싶지만, 돌아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양혜왕의 말대로 ‘다른 제후들이 하지 못한 일을 했는데 왜 백성들은 그를 외면했을까’라고 물어보면 된다. 사람들이 양혜왕이 시쳇말로 꼼수 부린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농업국에서 인구는 노동생산력이자 군사력의 바탕이다. 양혜왕이 시혜를 베푼 것은 백성의 곤궁한 삶을 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국강병을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을 뿐이다.

위민과 여민의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한 이는 배병삼 교수다. 그는 『유교란 무엇인가』에서 위민은 ‘자기목적을 위해서 군주가 인민을 도구로 삼는 것’이라 하면서 『맹자』에 위민이라는 낱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돋을새김했다. 배 교수는 이 책에서 여민의 다양한 용례를 소개했다. ‘인민과 함께 더불어 즐긴다’는 뜻의 여민동락, 여민해락, ‘인민이 바라는 바를 같이 행한다’라는 뜻의 여민동지, ‘인민이 바라는 바에 기초하여 함께 한다’라는 뜻의 여민유지와 같은 말이 나온다고 한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정권 때 굳이 여민관을 위민관으로 바꾼 정치적 무의식을 헤아릴 만하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할 적에 거기에는 진정성보다는 술책과 기만의식이 있었을 테고, 국민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한낱 수단으로 삼아도 된다고 여겼을 터이다. 두 번에 걸친 보수의 집권기에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퇴행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지 못한 이유도 짐작할 만하다.

 물론, 비서동 명칭을 바꾸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쉽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현실정치인들이 『맹자』의 깊은 뜻을 헤아리길 바랄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민관으로 바꾼다는 말을 들었다. 이유인즉슨 ‘백성을 위한다(위민)는 뜻은 저희가 주체가 되고 국민이 객체가 되는 것인데 여민은 국민과 대통령이 함께 한다’는 의미로 보이기 때문이란다. ‘옳거니, 잘 생각했다, 이제 무언가 제대로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었다.

 당연히 명칭만 바꾼다고 위민에서 여민의 시대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맹자가 여민정신의  실현을 위해 혁신적인 제도를 제안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말만 앞세우지 말고, 그 말에 담긴 정신을 문재인 정권이 실현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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