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출판사 윤구병 대표

23일 파주 보리출판사에서 인문학 모임 '귀가쫑긋' 회원들과 만난 '변산공동체학교' 윤구병 대표


보리출판사 윤구병 대표
인문학모임 ‘귀쫑’과의 만남


[고양신문] 인문학 모임 ‘귀가쫑긋’ 회원들이 지난달 23일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보리출판사에서 윤구병 대표와 만났다. 윤 대표는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고, 충북대 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보리출판사’를 만들어 어린이를 위한 책을 다수 만들었다. 이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변산공동체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교육하며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세월호 죄책감으로 삭발

삭발한 머리에 합장으로 회원들을 맞이한 윤구병 대표는 자신의 행색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삭발을 한 이유는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이 교과서를 공부해 치르는 시험문제의 답은 하나다. 그것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세상 문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단원고 학생들이 본능에 반응해서 행동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다 살아남았을 것이다. 당시 ‘선실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세요’라는 말을 아이들은 정답으로 알았고 그래서 뛰쳐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가르치는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15년 동안 국립대학 교수 노릇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정답을 가르쳐왔으니’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머리를 삭발하고 있다는 것.
 

보리출판사에서 변산공동체학교 윤구병 대표의 강연을 듣고 있는 '귀가쫑긋' 회원들

아홉째라 구병, 여섯 형 전쟁 때 잃어

이어 그가 자신의 이름 ‘구병’에 대한 사연을 설명할 때는 폭소가 터졌다. 상상력이 부족한 아버지께서 첫째를 일병으로 시작해 아홉 번째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 그의 어머니가 아들만 아홉 명을 나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귀가 얇으신 그 아버지 덕분에 7살 때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파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때 두 달 사이에 형 여섯 명이 절반은 국군에게 절반은 인민군에게 끌려가 죽었다. 이후 1·4후퇴 때 아버지는 남은 세 아들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꾼을 만들었다.

경제적인 이유로도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는 시골 생활을 한 덕분에 자기 삶의 시간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살 수 있었다. 들풀처럼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그때 길렀다.


함부로 책 만들지 않는 출판사

윤 대표는 1988년에 문을 열어 거의 30년 된 보리출판사와 관련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출판사 중에는 한 해에 500종이 넘게 책을 만들어 내는 출판사들이 있는데 30년 동안 보리출판사가 만들어낸 책은 300종 남짓이다.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남과 경쟁하지 말자’며 욕심을 내지 않았다.

나무를 베어 그 펄프로 책을 만드는데 ‘나무와 우리는 어떤 사이인가’를 생각해 봤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책만을 내자'는 생각으로 책을 만들다보니 그 정도 밖에 안 됐단다.

보리출판사가 만든 『보리국어사전』은 만드는 데 7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외래어 투성이인 기존 사전과 달리 남과 북이 모여 살 때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북에서 쓰는 말이어도 기본이 되는 말은 집어넣었다. 세밀화도 3000점이나 들어갔다. 이것을 준비하고 사전이 나오기까지 거의 20년이 소요된 셈이다.


영세중립 통일연방 코리아

강연 말미에 윤 대표는 젊은 부모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최근 생명평화 운동가인 도법 스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자신도 염불을 하나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윤 대표가 만든 염불은 바로 ‘영세중립 통일연방 코리아’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처럼 주문 삼아 외워야 할 말이 ‘영세중립 통일연방 코리아’라는 것. 그것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남미의 코스타리카가 영세중립국이다. 그 과정은 다르지만 영세중립국이 되니 군대가 없어지고 세계 평화기구들이 자리잡았다. 영세중립은 역사적으로 고종황제와 유길준 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장한 것이다. 우리 뜻과는 무관하게 남과 북이 국제법상 갈라져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칭하고 남은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이라 한다. 지금처럼 남과 북의 아이들이 국적은 다르더라도 나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과 북은 그 체제가 다르니 서로 체제를 인정하면서 연방형태로 통일을 하자는 의미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꼭 자신이 말한 염불 ‘영세중립 통일연방 코리아’를 밤낮으로 외워 우리 아이들에게 전쟁 대신 평화유산을 물려주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우리 아이들을 살리고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주고받게 만들려면 보리출판사 책을 읽게 하고, 초강력 수면제로는 자신이 쓴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책이 있다며 익살스럽게 권하기도 했다.
 

귀가쫑긋 회원들에게 강연 후 싸인 중인 윤구병 대표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회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윤 대표와 회원들의 일문일답

Q.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병원치료를 받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뭔가.(실제로 그는 현재 간암 투병중임에도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있다.)

A.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사람이 칠십을 살기는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75세다. 이제는 언제 어떤 이유로 죽어도 자연사다.
1995년 변산에 들어간지 22년이 됐다. 그 동안 치과를 제외하고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 그전에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었다. 음식을 소량으로 많이 씹어 먹었고 철저히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변산에서 지내니 가능한 일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세대가 많은 죄를 지었다. 선조들로 부터 물려받은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을 다 오염시켰다. 깨끗한 땅을 물려받았는데 농약 범벅을 만들었다. 그리고 88만원 세대를 만들어 냈다. 우리 세대는 빨리 죽어야 한다.

 

Q. 변산으로 내려간 이유는.

A.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이 25% 남짓이다. 밀 자급률은 0.2%, 잡곡은 5% 정도밖에 안 된다. 보수나 진보 정권에 상관없이 식량주권을 가져야 자주국방도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농촌에는 젊은이들이나 일손이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이 농사를 이어 받아야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몸과 손·발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서 변산에 내려왔고, 젊은이들이 시골에 와서 고되게 일하지 않아도 문화생활도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Q. 변산공동체에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A. 아이들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현재 우리는 아이들의 손발을 묶어 놓고 있는 형국이다. 교실 안에만 묶어놓는 이런 교육에만 순응하다보면 아이들이 살 길이 없다. 적어도 석 달 중에 한 달은 농사를 도울 겸해서 들에서 보내고, 한 달은 바다에서 나머지 한 달은 산에서 보내도록 하면 부모도 아이도 선생님도 행복할 수 있다.

 

Q. 이상적인 공동체 모습은 무엇일까.

A. 서울에 고층빌딩 하나 짓는 비용으로 시골에서는 2백여 가구가 살면서 문화시설이나 학교시설도 지을 수 있다. 도시의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농토가 50%가 넘는데 지자체나 국가가 그 농토를 구입해서 농촌 사람들에게 경작권을 주고 10분의 1이나 9분의 1정도 일정 소출을 받도록 해야 한다. 변산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강연을 마친 윤구병 대표와 귀가쫑긋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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