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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국가의 현대화 도구이자 국민의 중산층 편입수단일산신도시를 통해본 아파트 정책 진단과 미래전망1
  • 이병우 기자
  • 승인 2017.08.03 19:42
  • 호수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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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신도시를 통해본 아파트 정책 진단과 미래 전망

①아파트의 역사와 문제점, 그리고 일산신도시의 탄생
②도시팽창에 못 미치는 주거안정성  
③떠오르는 대안, 사회주택의 국내현황
④사회주택의 선진국 - 오스트리아에서 배우다1
⑤사회주택의 선진국 - 오스트리아에서 배우다2
⑥일산신도시를 통해본 한국의 주택 정책의 문제점과 대안

이번호부터 시작될 기획 연재되는 ‘일산신도시를 통해본 아파트의 진단과 미래 전망’은 고양시 일산신도시의 아파트 탄생과 성장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의 일관된 흐름을 살펴보고 미래를 조망해본다. 특히 아파트가 주거안정성 보다 재산투자 대상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정부의 주택정책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짚어봐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불공정한 소득 재분배 형성 과정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나라에 비해 기형적으로 크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유럽의 선진 아파트, 특히 ‘사회주택’이 발전한 오스트리아의 주택정책을 들여다보는 한편 우리나라 주택정책이 나가야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사회주택은 주택 문제를 시장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공공 서비스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떠오르는 대표적인 주택 형태다.

이번호에서는 다른 주택 선진국과 달리 한국이 왜 아파트 공화국이 됐는지를 진단해본다. 아파트 공급을 늘려 치솟은 아파트 가격을 하락시키고 주거안정을 시키려는 노태우 정부    의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에 일산신도시 탄생 배경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신도시 탄생 배경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아파트의 기원을 약 2000여 년 전 로마시대에 서민에게 임대하기 위해 만든 ‘인슐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현대식 아파트의 출발점은 18세기 중반의 산업 혁명과 관계가 깊다. 산업혁명은 노동자 착취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를 안게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18세기 후반 ‘도시계획법’을 만들었다. 이어 프랑스 정부도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자와 빈민에 대한 주거 구제대책을 논의하게 됐다. 인구는 과밀해지고 주택이 부족한 분위기에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 건축 조례를 통해 환경이 좀 더 나은 집합주택을 보급하였다. 이것이 근대적 아파트의 시초였다.

아파트, 권위적 국가성장 모델의 표상
고도성장을 거듭했으며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우리나라에도 아파트는 도시개발사의 중추적인 주거용 건축양식이었다. 하지만 주거용 건축양식으로서 현대적인 고밀도 아파트의 시초는 1964년 서울시 도화동의 마포아파트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물론 훨씬 그 이전인 1930년, ‘공동주택’ 개념으로서 이례적으로 주택을 일제에 의해 3층으로 올린 서울시 회현동의 경성 미쿠니상사도 존재했었다. 또한 국내 아파트의 시초를 1932년 역시 일제에 의하여 세워진 서울 충정로의 5층짜리 유림아파트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지어진 각종 공동주택은 건물 안에 공동화장실과 식당이 있어 아파트라기보다 ‘관사’에 더 가까웠다. 또한 마포 아파트 이전에도 종암아파트나 개명아파트도 있었지만, 단순히 주거만을 고려했던 단계를 넘어 대규모 주택용지에 여러 개의 건물을 짓는 ‘단지’ 로 설계한 것은 마포아파트가 최초다.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에서 마포아파트가 갖는 상징성은 크다. 당시 신문자료를 찾아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마포아파트단지 완공 연설에서 ‘아파트는 봉건제도의 모든 잔재와 농촌의 낙후성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국가 현대화의 도구이자 대안’으로 표현했다. 물론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 사태는 부정부패가 개입된 부실공사의 결과였지만 아파트는 국민들로부터 권위주의 국가 주도의 성장 모델로 비쳐지면 환영받았다.

고양시에서는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투기 열풍 해소를 목적으로 건설된 수도권의 1기 신도시 가운데 하나로 일산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1990년 3월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일산신도시 건설을 시작했으며, 1992년 12월에 준공됐다. 476만평에 6만9000세대, 인구 27만 6000명이 입주하면서 고양시는 아파트 도시로서 팽창하게 됐다.


서민주택보다 주택 매매정책 일변도  
통계청에서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2015년 우리나라 주택수는 1911만 가구를 헤아린다. 이중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가구는 920만 가구로 48.1%를 차지한다. 2010년 815만 가구(46.2%)에 비해 105만 가구(1.9%p) 증가한 셈이다. 반면 2015년 현재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가구는 674만 가구(35.3%)로 2010년 681만 가구(38.6%)에 비해 7만 가구(3.3%p) 감소했다<그래프 참조>.
 

2015년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고양시 전체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62%다. 향후 고양시에 원흥지구, 지축지구, 향동지구의 입주를 감안하면 아파트 거주 비율이 더 높아지게 된다. 일각에서는 “고양시의 공동주택(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 거주 비율이 80%에 육박하며 이는 국내에서 최고로 높은 비율”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 프랑스 학자로부터 ‘아파트 공화국’이라 일컬어졌던 대한민국에서도 고양시는 대표적 아파트 도시다.

이러한 아파트 확산의 이면에는 서민을 위한 장기임대주택은 거의 없고 주택 매매 정책만 있는 주택정책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 주택정책을 집행하는 과거 한국토지개발공사나 대한주택공사, 현재의 LH는 서민주택 건설에 이바지한 기관이었다기보다는 경제성장 모델에 순응하는 정부 정책의 시행자였다. 한국주택관리원의 한 전문가는 “주택정책 목표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불균형적 주택자원의 배분, 주택가격의 상승, 불량촌 상존, 불공정 거래, 주택투기의 만연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직간접으로 개입하는 것이 주택정책”이라며 주택정책“이라며 “한국의 주택정책은 1960년대 초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정부정책으로 주택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하면서 주기적 집값 폭등과 부동산투기가 만연하여 한국의 주택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보기 드문 사회경제적 문제를 유발했다”고 말했다.

아파트=재테크의 고착화 오래 방치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가장 유효한 재테크 수단이었다. 아파트는 시세차익을 보장해주는 중산층의 주거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아파트=재테크’라는 등식은 고착화됐다. 선진국의 주택거래량이 전체 주택의 5%정도에 불과한데 비해 국내 주택 거래량은 전체주택의 20% 가깝다는 것은 이러한 등식이 국내에서 강력하게 힘을 발휘한다는 증거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아파트는 표준화된 평면을 갖고 있고 지역마다 개별 가격 정보가 수시로 공개되기 때문에 환금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끌어왔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아파트는 국가성장모델로 선전되고 대기업의 건설 회사는 지정업체로 선정되면 영예로운 일로 여기는 것이 통념이었다. 서민들이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분양되는 아파트를 매입하는 것이 중산층으로 편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통과의례가 된 것이다. 동시에 분양에 당첨된 가구는 중산층으로 편입되면서 국가체제의 수혜자이자 동조자가 되는 셈이다. 권위주의 정부와 대기업 간 공생의 사슬 구조에 따른 아파트 양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득격차를 주택정책 입안자들은 오랫동안 회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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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통일로 인접한 곳도 고려했었다”

집값 잡기 위해 신도시 조성 보완책 나오지 못해 아쉬워 

인터뷰-일산신도시 조성 집행한 이상희 전 건설부 장관

이상희(85세) 전 건설부 장관은 고양시와 인연이 깊다. 한국토지개발공사 사장 시절, 일산신도시를 비롯한 1기 신도시에 대한 계획을 집행한 장본인이다. 또한 호수공원을 최초로 구상했고 일산신도시 조성 이후 자유로 건설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일산신도시 탄생에 깊숙이 개입한 그가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의 일산신도시를 어떻게 바라볼까. 구상단계의 일산신도시와 지금의 일산신도시는 어떻게 다를까. 이상희 전 장관을 만나 여러 궁금증에 대해 물어봤다.
 
 

일산신도시 탄생에 깊숙이 개입한 이상희(85세) 전 건설부 장관은 “일산이 문화도시, 외교도시로 성장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 일산신도시 탄생에 크게 개입한 장본인으서 일산신도시 탄생 배경을 설명하자면. 
노태우 정부 시절 한국토지개발공사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내게 주어진 큰 임무가 있었다. 바로 1990년대 초반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는 집값을 잡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가급적 빨리 아파트 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급증하는 아파트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새 아파트를 어디에 지을까를 놓고 고심했다. 결론적으로 서울 근교에 강남 아파트 못지않은 아파트가 밀집하는 신도시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 생각이 구체화된 것이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1기 신도시 계획과 이른바 ‘200만호 건설’ 계획이다. 이 5개 신도시 중 서울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대표적인 신도시로 분당과 일산을 지정했다. 그런데 분당과 일산은 신도시를 조성하기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분당은 기존에 있던 비행장과 통신시설을 어떻게 피해서 신도시를 조성할까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일산은 휴전선과 가까운 위치에 어떻게 입주민을 끌어들일까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고양군 내에서도 통일로에 근접한 곳에 신도시를 조성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일산신도시 위치에 신도시를 조성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도 있었다.

- 일산신도시 구상 당시 어떤 성격의 도시로 발전하길 원했으며 지금 와서 어떤 아쉬움이 남는가.  
분당은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하고 힘찬 에너지를 분출하는 도시로, 일산은 중년층과 노년층이 조용하면서도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에서 여유롭게 살 수 있는 도시로 구상했다. 특히 일산은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전신주, 굴뚝, 담장 이 3가지가 일체 없는 도시로 조성할 것을 도시 설계자에게 강조했다. 또한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스위스의 ‘레만호’를 꿈꾸며 도심 속에 호수공원을 구상했다. 분당에도 도심공원이 있지만 일산의 호수공원에 턱없이 못 미친다. 도시의 미적인 측면이나 쾌적함 측면에서는 분당이 일산을 못 따라온다.  
또한 일산은 문화도시, 외교도시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전국에서 가장 큰 공연장과 박물관을 갖춰 문화도시로서의 성격을 갖춘 도시로 성장하고, 각국의 대사공관을 유치하고 대사관들이 많이 머무는 외교도시로 커갈 것을 바랐다. 고양시가 문화도시로서는 어느정도 성장했지만 외교도시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이 점은 아쉽다.

- 아파트 가격을 잡기 위해 일산신도시를 조성했지만 신도시 조성 이후에도 아파트 가격은 계속 뛰었는데. 
1기 신도시 조성 직후는 어느 정도 집값이 잡히는 듯했다. 주택 수요를 1기 신도시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모든 주택 수요를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기 신도시 분양 당시에도 당첨 경쟁률이 높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가격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는 방법 외에 아파트 가격을 잡을 수 있는 보완책이 있어야 했다.

- 일산신도시 주진입로인 자유로 건설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자유로는 통일 이후를 대비해서 평양으로 갈 수 있는 도로 개념으로 구상됐다. 처음에 내가 자유로를 구상했을 때 정부 관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10차선 도로를 만든다니까 다들 정부의 큰돈만 버린다는 주장만 내세웠다. 나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육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시할 것만을 부탁했다. 비용문제 등 나머지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자유로 조성 문제는 국무회의에서 두 번이나 부결됐다. 토지공사 사장 이전에 내무부 장관을 거친 내 경험에 비춰 볼 때, 관계 부처 장관과 관료들의 근시안적 생각은 나를 너무 화나게 했다. 나는 그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했다. 당시 노재봉 대통령 특보만이 자유로 건설에 강력히 찬성했다. 다시 한 번 자유로 조성 문제는 국무회의에서 논의됐고 의결됐다. 결국 육군자유로건설사업단의 지원을 받아 토지개발공사가 시행하는 형태로 자유로는 1990년 10월에 착공됐다. 공병대가 한강의 모래를 퍼서 일사분란하게 공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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