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얼마전 외국에서 오래 살던 선배가 잠깐 귀국해 점심을 같이했다.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 이제 좋은 세상 만들었으니 들어와 함께 살자고 농을 했다. 그러다 우리가 지난 십년동안 얼마나 힘들게 산지 아느냐고 큰 소리쳤다. 허튼 소리에 일행이 박장대소하며 훈훈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과연, 내가 힘들게 살았나 되돌아보았다. 정치적 퇴행에 대한 분노로 괴로웠지만, 내가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읽고 쓰고 뻥까고 마시는’ 신선놀음으로 세월을 보내는 내가 블랙리스트에 오를 일도 없고.

그런데 말이다, 내가 비록 체험자는 아니지만, 목격자이기는 하다. 지난 보수정권에서 고난의 길을 걸은 이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십년도 넘었다. 첫 인상이 잘 생겼다였다. 훤칠하고 울림이 큰 목소리를 자랑했다. 그이의 옆에 앉아 있는, 그 유명한 정은임 아나운서랑 잘 어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이를 격주로 만났다. 그이는 군더더기기 없이 진행했고, 선배인 정 아나운서를 잘 뒷받침했다. 나는 그저 전문가입네 하며 편하게 몇 마디 던지면 되었다. 김중배 사장 시절, MBC 텔레비전에 책 프로가 있었는데, 그 때 이야기를 한 거다.

세월이 한참 지나 MBC  라디오의 책 프로에 나가게 됐다. 처음에는 경험 많은 피디가 맡았는데, 다음부터는 피디가 자꾸 바뀌었다. 주말에 겨우, 한 시간 나가는 방송이라 신경을 안 썼던 모양이다. 어느 날, 녹음하러 갔더니, 그이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진행자가 바뀐 줄 알았다. 그런데 피디란다. 잉? 이게 뭔 일이지라고 말할 뻔했지만, 금세 눈치 챘다. 그이도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부당발령을 받았고, 이제 겨우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주로 라디오 편성 일을 하면서 책 프로를 맡은 모양이었다.

워낙 쿨한 사람인지라, 십여 년 전에는 술 한잔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로그램 회식을 빙자해 술을 마셨다. 잘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술김에 떼를 써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내상이 깊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그이는 낙관적이었다. 용서와 관용을 이야기했다. 나는 또 술김에 용서와 관용이라니, 어림없는 말이라고 통박했다.

그동안 그이는 파업에 참여했던 후배 아나운서가 퇴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겼던 후배 아나운서가 윗선의 방해로 하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얼마전, 시간 남아돌고 넉살 좋은 내가 술 하자고 그이를 꼬드겼다. 그이가 다른 프로그램을 맡을 즈음 수술을 했다. 긴 기간 금주를 해야 했다. 그가 금주에서 벗어날 적에는 내가 작은 수술을 했다. 오가며 술 한잔 하자는 인사를 했건만,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데 너무 긴 시간이 지났다.

술잔을 주고받다 우연히 그의 갑상샘에 난 수술 자국을 보았다. 술 기운이 돌아서 그랬나, 그만 울컥했다. 의학적으로 발병한 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가 겪은 절망과 분노가 그 자국을 남겼다 여겼던 셈이다. 그 자리에서도 그는 여전히 긍정적이었고, 너그러웠다. 대인(大人), 이라는 말은 이럴 적에 쓰라고 있는 말일 테다.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진실을 시민에게 알려야 하는 공영방송의 기본을 지키려고 파업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긴 시간, 모욕과 좌절의 늪에 빠졌다.

이제, 촛불혁명을 일으킨 시민의 힘을 믿고 그들이 다시, 떨쳐 일어났다. 사람 좋은 그이도 나섰다. 자신을 ‘유휴인력’이라 소개하며 아나운서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는 공개적인 인터뷰를 했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일 테다.

다시, 시민의 사랑을 받는 방송으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실천의지의 선포다. 바라건대, 가까운 시일에 그와 책 프로그램을 함께 했으면 한다. 물론 이번에는 피디가 아니라 MC로 말이다. 내가 방송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이는, 박경추 아나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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