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서원 복원 추진해 온 이은만 문봉서원장

고양8현 모신 문봉서원, 1870년 훼철
시, 복원 자료조사 예산 책정
끈질긴 복원 노력과 기다림 비로소 결실

 


[고양신문] 신원동 송강문학관 인근에서 만난 이은만 문봉서원 원장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가득했다. 이 원장이 30여 년 가까이 매진해 온 숙원사업인 문봉서원 복원에 청신호가 켜진 것을 축하한다는 기자의 인사에 이 원장은 손사래를 쳤다.

“문봉서원의 복원은 제 개인의 염원이 아니예요. 고양의 정신문화의 가치와 뿌리를 되찾는, 100만 고양시민 모두의 경사입니다.”

이 원장의 말대로 고양시 유림들과 지역 인사들의 오랜 바램이던 문봉서원 복원이 가시화됐다. 최근 마무리된 고양시 추경예산에서 ‘문봉서원 복원에 따른 부지 선정 및 자료조사 용역비’ 3000만원이 책정된 것. 아직은 기초적인 타당성 조사 비용이 마련된 것에 불과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지지부진하던 사업의 첫 걸음을 비로소 떼었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복원 작업을 기대토록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문봉서원 복원 사업의 중심에는 늘 이은만 원장이 자리했다. 1988년부터 문봉서원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며 복원 논의에 불을 지핀 이가 바로 이 원장이다. 당시 고양문화원장을 맡고 있던 이 원장의 노력으로 1989년 한성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문봉서원과 고양8현’을 연구주제로 채택해 한성대 정후수 교수를 중심으로 문봉서원에 배향된 고양8현의 생애를 비롯한 폭넓은 자료가 정리됐다.

문봉서원은 1688년(숙종 14년) 고양에서 배출된 선비들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1709년(숙종 35)에 ‘文峯(문봉)’이라는 이름을 받고 고양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후 선현들에 대한 배향과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서원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최초 4명의 선비들을 모시다 추후 4명의 선현들이 추가 배향되어 남효온·김정국·기준·정지운·민순·홍이상·이신의·이유겸 등 여덟 분의 위패를 모셨다. 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강제 철거됐다.

이 원장은 ‘건물은 없어도 선현을 기리는 제사는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림들과 뜻을 모아 1995년부터 고양8현을 기리는 추향제(가을에 올리는 제사)를 시작했다. 이후 추향제는 매년 이어지고 있지만, 서원 건물이 없어 고양시청에서 진행되는 형편이다.

문봉서원에 대한 다양한 자료 편찬과 홍보도 이은만 원장의 몫이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 발간한 ‘고양의 얼을 찾아서’를 비롯해 다양한 책자와 기고를 통해 문봉서원의 역사적 의의와 고양8현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이 원장은 고양의 유림들과 지역 인사들의 염원을 엮어내며 문봉서원 복원 추진 노력을 줄기차게 이어 왔지만, 시는 예산 등의 문제로 오랫동안 복원 추진을 미뤄왔다.

문봉서원이 있던 자리는 2000년 지표조사를 통해 현재 문봉동주민센터 건너편으로 밝혀졌다. 마을에는 하마거리, 하마터 등의 지명이 여전히 전해온다. 하지만 자리는 현재 큰 도로가 나 있는 등 여건상 서원 복원에 적합지 않다는 게 이 원장의 견해다.

이은만 원장은 훼철 이후 147년만에 서원이 다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 준 시와 시의회의 결정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이번 부지선정 자료조사를 통해 적합한 부지를 찾아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문봉서원이 과거의 역사만을 기리는 곳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도덕성 회복을 위한 인성교육기관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서원 스테이’ 건물로 지어졌으면 한다”는 바람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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