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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객과 화가들 사로잡은 사기막골의 숨은 비경, 청담동(淸潭洞)<선인들의 숨결 따라 걷는 북한산> 우암 송시열과 겸재 정선의 길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7.09.15 22:30
  • 호수 1338
  • 댓글 1

수많은 시와 그림 양산한 북한산 최고의 명승
송시열의 각자 암반, 와운루·농월루 터 남아
세월의 베일 벗고 역사 문화적 가치 재조명

 

청담동의 비경을 그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농월루대적취강’(삼성미술관 소장). 청담동 계곡의 백미인 와운루와 농월루, 계곡 건너편 적취강 능선의 모습이 선명하다. <자료제공=한국등산사연구회>


[고양신문]  청담동(淸潭洞)을 아는가. 서울 강남의 청담동이 아니라 북한산 사기막골 청담동 계곡 말이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문사와 시인들이 ‘북한산 최고의 절경’, 또는 ‘금강산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라 칭했고, 겸재 정선은 청담동의 풍광을 자신의 진경산수화에 담았다고 한다. 게다가 입구부터 온전히 고양땅에 속한 몇 안 되는 구역이기도 하니 호기심은 더 커질 수밖에.

하지만 청담동은 손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지역이다. 북한산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에 속했지만 1970년대 중반 군부대 훈련장이 들어서며 일반인 출입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청담동의 실체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진 채 마치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과 귀를 넘나들 뿐이다.

지난 9일, 국립공원관리공단과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역사자원조사 목적의 출입 허가를 받았다. 오랫동안 청담동의 실체를 연구해 온 한국등산사연구회 회원들과 동행해 비로소 청담동의 비경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답사에서 확인한 내용과 한국등산사연구회의 조사·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청담동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대 순으로 정리했다.
 

청담동으로 들어서는 계곡 초입에서 만날 수 있는 청담동 각자. <사진제공=한국등산사연구회>


■ 청담동의 첫 주인공 구시경과 청담초당

청담동과 관련해 가장 먼저 흔적을 남긴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 독락재(獨樂齋) 구시경(具時經, 1637~1699)이다.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제자였던 구시경이 청담동에 초당을 짓는다. 특히 그는 청담초당(淸潭草堂)에서 책읽기와 산수 감상으로 소일하며 은둔생활을 한다. 청담초당의 흔적은 현재 찾을 길이 없고 위치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다만 우암의 시가 새겨진 석벽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 우암 송시열, 청담을 찾다

청담초당은 현종 9년(1668년) 송시열이 이곳을 방문한 후 유명세를 탄다. 송시열은 이곳에 ‘청담동’이라는 글씨와 ‘서산정사’라는 편액을 써 줘 이후 청담초당은 서산정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우암은 또한 청담에서의 소회를 담은 차운시(次韻詩) 2편을 남긴다.

송시열의 방문 이후 청담초당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우암을 추종하는 많은 문사들이 뒤를 이어 차운시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구시경이 조선 중기의 대표적 당파논쟁인 예송논쟁의 격랑을 겪고 난 후 가족들과 함께 황해도로 이주하면서 청담초당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지고 만다.

사람은 떠났어도 바위에 새긴 흔적은 남았다. 현재 사기막골 입구에 크고 힘찬 필치로 각자된 ‘청담동’ 이라는 암각글씨가 방문자를 반긴다. 송시열이 남긴 차운시 2편 역시 계곡 중턱의 바위벽에 남아 있어 당시의 감흥을 짐작케 한다.
 

우암 송시열이 청담동을 찾아 남긴 차운시를 새긴 암반과 안내석비. <사진제공=한국등산사연구회>


■ 홍석보·홍상한, 와운루와 농월루 세워

청담동에 새로 터를 잡은 이는 조선 후기 명문가 중 하나인 풍산 홍씨 가문의 문신 홍석보(洪錫輔, 1672~1729)다. 풍산홍씨의 세거지가 고봉산 아래 있었다고 하니, 고양땅과 인연이 이어진 듯하다. 그는 1702년 청담동 계곡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자리에 와운루(臥雲樓)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와운루 건립과 함께 청담동은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도성 인근 최고의 명승이라는 찬사와 함께 문사들의 방문이 이어져 김시민의 ‘청담기’(1708), 심육의 ‘일기’(1712), 어유봉의 ‘청담동부기’(1742) 등 수많은 묵객과 시인들이 유산기와 시를 남기게 된다. 와운루와 관련된 시는 현재 전하는 것만으로도 250여 수에 달한다.

홍석보의 아들 홍상한(洪象漢, 1701~1769) 역시 홍석보 사후인 1733년 와운루 바로 옆에 농월루(弄月樓)를 지어 세세손손 누릴 터전을 닦고자 했다.

와운루와 농월루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규모와 형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밀한 학술적 연구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선인들이 남긴 다양한 기록 속에 누각 옆에 3층으로 된 평평한 바위가 있었고, 계곡 건너 적취강이라는 능선이 전개되고, 동남쪽 터진 곳으로 인수봉이 보인다고 적은 것 등으로 미뤄 인수봉과 영봉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계곡 옆의 너른 바위터에 서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 풍부한 자료 담긴 어유봉의 ‘청담동부기’

청담동에 누각을 세운 이들은 홍석보·홍상한 부자이지만 가장 풍성한 기록을 남긴 이는 어유봉(魚有鳳, 1672~1744)이다. 홍석보의 벗이자 사돈(홍상한의 장인)으로 누구보다도 청담동을 아끼고 누렸던 어유봉은 사망 두 해 전에 청담동에 관한 내용을 담은 ‘청담동부기(淸潭洞府記)’를 남긴다.

청담동부기는 청담동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정보를 전해주는 아주 소중한 자료다.

■ 겸재 정선이 남긴 진경산수화

지금까지 청담동과 관련한 문사들의 이야기를 살폈다면, 이제 화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자. 청담동의 수려한 경치는 수많은 화가들의 소재가 됐다. 무엇보다도 이 땅에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청담동을 화폭에 담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청담동과 관련된 그림은 겸재가 그린 ‘농월루대적취강(弄月樓對積翠岡)’, ‘청담와폭(淸潭臥瀑)’ 두 점과 겸재의 제자인 불염재 김희성(金喜誠, 생몰년 미상)의 ‘와운루계창(臥雲樓溪漲)’, ‘청담침수대(淸潭枕漱臺)’ 등 4점이 확인된다.

등산사연구회는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 그림들이 청담동을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들이라는 사실이 밝혀냈다.

겸재와 불염재의 그림과 청담동의 연관성을 확인해주는 문서도 앞서 언급된 어유봉의 ‘청담동부기’다. 와운루, 농월루는 물론 ‘적취강(績翠岡)’이라는 지명도 청담동부기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유봉은 “남행 산록이 서쪽으로 돌아간다. 바위언덕이 울창하게 서려 있고, 풀과 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있어서 적취강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겸재 정선의 ‘농월루대적취강’의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자 화평가인 강세황이 “옛스러우면서도 노련하며 전아하면서도 굳세니, 이것이 겸재 그림의 본래 모습”이라는 내용의 제발을 적어놓았다. 강세황의 말처럼 그림은 와운루와 농월루, 계곡의 바위, 건너편 적취강의 풍경을 우아하고 기운찬 화필로 그리고 있다.

‘와운루계창’에는 김희성 스스로 부가 설명을 적어 넣었다. “병자년 가을 구호상공과 겸재공이 청담으로 놀러 갈 때 두 분을 모시고 나도 갔다. 당시 가을비가 내려 계곡물이 불어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래서 그린다.”

그의 설명대로 그림속에는 물줄기가 세찬 기세로 흘러내리는 계곡 옆 너른 바위 위에 삿갓을 쓴 두 사람이 비 내린 계곡의 풍광을 즐기고 있다. 계곡 건너 암반 위에는 와운루의 당당한 모습이 확연하다. 한 사람은 비를 막아주는 도롱이도 두르고 있다. 연도를 계산하면 겸재의 나이 81세에 이곳을 찾은 셈이니, 청담동의 경승을 아끼는 겸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겸재 곁의 구호상공은 바로 와운루와 농월루의 주인인 홍상한이다.
 

불영재 김희성 ‘와운루계창'(삼성미술관 소장). 군부대와의 협약에 의해 기사에 청담동 경관 사진을 게재하지 못하지만, 정선과 김희성의 진경산수화가 청담동의 절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아쉬움을 달래준다. <자료제공=한국등산사연구회>


■ 청담동의 흔적을 찾아 나선 세 명의 선비

하지만 아쉽게도 와운루와 농월루 역시 세월의 야속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세월을 훌쩍 건너 뛰어 1870년 봄 한장석(韓章錫, 1832~1894))과 어윤중(魚允中, 1848~1896), 서응순(徐應淳, 1824~1880)이 선인들의 흔적을 찾아 청담동 계곡에 발을 들인다.

그들이 남긴 ‘유청담기(遊淸潭記)’에는 진관천과 창릉천을 따라 사기막골까지 들어와 살구나무가 만개한 한적한 마을을 지나 청담동 계곡으로 접어드는 장면이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묘사돼 있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오를수록 바위가 기품있어지고 물이 맑고 기운차게 흐르는 모습에 넋을 잃고 빠져드는 세 사람의 심상이 드러난다.

이어 옛 문헌을 더듬으며 두 개의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었던 와운루 터를 확인하고, 청담의 북쪽 암벽에 새겨놓은 우암의 시를 확인하며 감격하는 모습도 묘사된다.

하지만 청담동을 지키던 청담정사와 와운루의 흔적이 인근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진 사실에서 안타까움과 무상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 일제강점기 구가원과 육모정

이후 청담동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무렵 다시 구시경 후손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구씨 집안에서 청담동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구가원(具家園)이라는 원림(園林)을 조성한 것이다. 그들은 우암의 글씨를 모사해 구가원이라는 이름을 바위에 새기기도 했고, 와운루 앞 계곡의 건너편 바위에 육모정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야수파로 불렸던 화가 구본웅의 화실이 이 곳 청담동에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육모정 역시 사라져 터의 흔적만 남아있고, 육모정고개라는 지명이 근래까지도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 벗과 더불어 자연을 즐긴 선인들의 정취

청담동의 오늘은 어떤가. 발길이 막혀 있어 기억과 생각의 길도 막힌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십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덕분에 계곡의 절경과 역사유적의 아슬아슬한 흔적이 그나마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최근 들어 청담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의미 있는 연구 성과들도 속속 도출되고 있다. 조선 중기와 후기 청담동을 중심으로 자연의 풍류를 찾고 벗들과의 교유를 즐겼던 선인들의 발자취는 보다 폭넓고 심도 있게 조명되어도 좋지 않을까.

서응순의 ‘유청담기’에 실린 한 편의 시에는 청담계곡에서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산을 잊어서는 안 되리니 / 이제라도 다시 띠집을 세우세 / 누각 위에는 천권의 책이요 / 마당가에는 삼척의 거문고일세 / 새들은 즐거이 냇가에서 울고 / 꽃들은 아름답게 숲속에 피어있는데 / 흰 구름은 고갯마루에 걸렸고 / 밝은 달은 연못 속에 가라앉았네 / 바윗길 따라 해는 서산으로 지고 / 나무꾼의 노래소리 들리는데 / 친한 벗이 찾아와 말을 매고 /책을 펼쳐 길게 읊조리누나

소박한 띠집을 지어 천 권의 책을 들이니 새들과 꽃, 달과 연못이 주변을 둘러싸고 넉넉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숲에서 나무꾼이 노래하는 세상이라면 세월도 태평성대일 터, 말을 타고 찾아 온 친한 벗의 책 읽는 소리마저 들리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있으랴. 자연의 아름다움을 벗과 함께 들여다보고 즐길 줄 알았던 선인들의 밝은 눈과 맑은 정신이 새삼 부럽기만 하다.

▲ 참고자료 : 한국등산사연구회 회보 『와운루』 1호
                  - '3인의 선비 청담동 유람에 나서다' (글 이종헌)
                  
- '청담동 와운루 진경산수화' (글 홍하일)
▲ 도움말 : 한국등산사연구회 홍하일 총무, 조장빈 회원


 

짧은 시간이지만 사기막계곡 청담동을 함께 답사한 고양신문 테마산행팀과 한국등산사연구회 멤버들.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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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장빈 2017-09-21 11:15:30

    근교에 아직 이런 문화유산이 감춰져 있었다니 반갑고 고맙네요. 고양신문사의 수고에 감사드림다.ㅎ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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