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 빛 시 론>

[고양신문] 지난 9월 5일 우리는 마광수 작가가 자택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그는 오랫 동안 앓고 있던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아직 판매금지에서 풀리지 않은 『즐거운 사라』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 역시 거기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즐거운 사라』가 처음 세상에 나왔던 1991년에는 문단이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 갑자기 대두된 여러 모양의 담론들과 싸우고 있었다. 직선제에 따른 정치적 충돌과 이념적 갈등, 노동 현장 등 저마다 불거진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 등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시국 선언이 터져 나오고, 농성하고, 시위하고, 구속되고, 최루탄이 난무하던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럴 때 그는 그것들과는 동떨어진, 전통적 보수 정서를 지닌 기득권자들의 위선과 이중적 속성을 고발하고 나선 것이다.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해야 할 성의 타락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어둠 속에서 행해지던 성문제를 백일하에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유교적 봉건사상이 만연해 있던 우리 사회를 고발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결코 작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는 나탈리 골드버그가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한 말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문학성은 등단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첫 시집 『광마일기』와 두 번째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보면 그가 평소 사회적 현상에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작가적 통찰력과 철학을 알 수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문학의 핵심이란 이처럼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는 작가란 끊임없이 기존의 틀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그의 작가정신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후로도 수십 종의 문학이론서와 학술서적 등을 출간해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곧 검찰이 구속 사유로 제시한 ‘성행위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용납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작품이 예술성에서 특별히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많은 부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서사와 묘사, 대사 등이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외설이냐 예술이냐 판가름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나라 필화 사건 가운데에서도 초유로 구속당할 만큼의 ‘외설’이었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문학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예술행위이며, 또한 작가 개인의 사유에서 비롯되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의 포르노성 소설들이 예술을 빙자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사회는 또 어떤가. 그 사이 간통법도 폐지되었으며, 기피하던 성에 대한 관념도 많이 바뀌지 않았는가. 한 작가를 평가하는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작품에 국한시키지 말고, 그 작가가 저술한 작품 전체를 놓고 유추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단을 비롯한 지식사회가 그를 여전히 ‘외설작가’로 묶은 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침묵하는 동안 그는 결국 다수로부터 외면당했고, ‘왕따’를 당했으며, ‘우울증’을 얻었고, 급기야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그를 변호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민주 사회에서 허용되는 다양한 표현, 다양한 사고를 가감 없이 드러낸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즐거운 사라』가 사후에라도 판매금지의 족쇄에서 해제되고, 재평가 받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또 한 번 우리에게 선구자적 용기를 보여준 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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