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국제공연예술제, 10개국 20개 팀 참가

벌써 스물세 돌을 맞은 창무국제공연예술제는(8.29~9.3) 해외의 컨템퍼러리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은 물론 우리나라 예술가들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매개가 되기도 하여 다양한 예술적 교류와 협업의 장이 되었다. 

올해 창무국제공연예술제는 ‘지금 현재’, ‘우리’를 주제로 하여 10개국 20개 팀이 참가했다. 해외 팀으로는 중국, 태국, 베트남, 뉴질랜드, 티벳 등 여러 나라가 참가했는데, 평소에 보기 어려운 아시아 컨템퍼러리 무용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무용제의 큰 소득이었다. 올해는 특히 여러 작품에서 음악과 무용수들의 콜라보레이션이 눈을 끌었다.

  여러 참가작들 가운데 중국 Hou Ying Dance Theater의 The Moment와 뉴질랜드 Atamira Dance Company의 Marama[Moon]는 작품의 높은 수준과 함께 아시아의 컨템퍼러리 댄스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뉴질랜드는 아시아 국가는 아니지만 예술제에 참가한 무용단이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방하는 단체라는 점에서 같이 묶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두 단체의 작품을 분석해 보는 것은 한국의 컨템퍼러리 댄스에도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중국 참가작 The Moment는 무용수들의 독특한 신체언어가 강하게 각인되는 작품이다. 결코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몸짓은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관찰과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오랜 탐구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호우잉 자신은 중국의 전통춤과 마샬 아트인 타이치를 트리샤 브라운이나 마사 그레이엄의 테크닉과 결합했다고 하지만, 팔다리와 온몸을 활용하여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트리샤 브라운의 테크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인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보여준다. 타이치의 흐느적거리는 듯한 몸짓이 춤과 결합하여 호우잉표 몸짓이 탄생한 것이라고 하겠다. 호우잉 춤에는 마디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춤에 마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몸짓은 흐느적거리는 연속 동작 안에 녹아들어가 하나가 된다. 안무가 호우잉은 즉흥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즉흥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즉흥은 절대로 무용수들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각본의 느낌을 멋대로 이해하라는 뜻이 아니다. 즉흥의 배후에는 반드시 충실히 자기의 느낌을 찾아서 표현하라는 것이라고 호우잉은 강조한다.

  The Moment는 호우잉표 몸짓과 함께 결코 만만치 않은 메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흐느적거리며 자유롭게 돌아가는 팔다리와 허리, 녹아내리듯 바닥으로 흘러내려 바닥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무용수들의 몸, 제각기 따로, 혹은 함께 모여 서로 몸을 비비적대다가 떨어져 나가는 무용수들의 움직임들이 문득 하나씩 둘씩 멈춰서는 순간이 있다. 기묘한 동작에서 제각기 멈춰버린 몸들이 주는 긴장감은 훅 하고 숨을 삼키게 한다. 무대 여기저기에 흩어져 뒤틀린 동작으로 멈춰버린 몸들은 좀비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하기도 하고, 인간은 모두 장애를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섯 명의 무용수들이 의자를 하나씩 들고 나와 제각기 자기 의자들을 바닥에 놓고 의자와 함께 춤을 춘다. 의자 위로 넘어지고 의자를 들고 빙빙 돌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무용수들이 문득 한 사람의 의자를 탐내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 위로 다른 사람이 몸을 던지고, 이를 밀어내는 사람 위로 새로운 사람이 또 몸을 던진다. 의자 하나를 두고 세 사람, 네 사람의 신체가 겹치고, 밀어내고, 의자에서 떨어지고, 회전하고, 마찰한다.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둔 사람들의 갈망이 절실하다. “모든 관계란 사실 겨우 하나의 동작일 뿐이니, 바로 놓아버림, 엎어지고 추락하는 것”이라는 호우잉의 말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무용수가 두 팔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감싸 안으려는 동작을 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두 팔에 안기기 전에 녹아서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의 신체가 흐느적대며 그대로 흘러내린다.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리는 것 같다. 몸으로 흘러내림을 표현하는 유연성이 놀랍다. 제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감싸 안으려 하지만 상대방은 연속적으로 흘러내려 바닥에 녹아버린다. 계속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두 팔 안에 안기지 않는다. 타인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말하고 싶은 것일까. 혹은 타인의 품에 안겼을 때 무화되어 사라지는 관계의 모순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Houying_The Moment

 희미한 빛 속에서 움직이는 무용수들 동작 위에 어떤 중얼거림, 속삭임들이 겹친다. 무용수들과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들리는 듯한 웅얼거림들, 그것은 기억일 수도 있고 다른 시공간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몸짓 안에서 느끼는 다른 시간의 호흡들이 구체적인 몸짓과 소리로 표현된다.

  또 하나, 이 작품은 무대를 전체적으로 남김없이 활용한다. 무용수들은 무대 바닥에 엎드리거나 눕고 뒹굴면서 온몸으로 바닥과 하나가 되어 안타까움과 괴로움을 표현한다. 무용수들은 의자와 함께 춤을 추기도 했지만 바닥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비교적 넓은 무대가 결코 넓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사오인 혹은 오륙 인의 무용수가 무대를 가득 채워 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호우잉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구상이나 동작에 대한 각본이 없고 즉흥뿐이라고 했지만, 또한 The Moment의 주제는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존재와 인간성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깊이 있는 관찰과 사색이 몸으로 표현되며, 그녀의 말대로 신체의 감각적인 표현은 감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The Moment는 이러한 호우잉의 철학이 몸짓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번 공연은 춤이라는 것이, 당연한 얘기지만, 새로운 테크닉과 기술적인 훈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가끔씩, 약간의 새로운 테크닉이 가미된, 그러나 깊이 고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별 내용과 감흥이 없는 컨템퍼러리 댄스를 볼 때 느끼는 허전함을 이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탐구가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몸짓을 낳는다는 사실을 호우잉의 춤은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뉴질랜드 Atamira Dance Company는 마오리 컨템퍼러리 댄스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단체이다. 마오리의 도시적 정체성을 위한 플랫폼이라는 지역사회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2000년에 창단된 이 무용단은 마오리 부족의 문화적 정체성과 함께 그들의 인권에 대한 열망이 담긴 작품을 만든다. 이번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 참가한 Marama는 마오리어로 ‘달’을 뜻한다. 달은 예전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마오리족 문화에서도 농사와 관련된 모종심기와 추수 등, 농사의 주기를 이끄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Marama는 창무회와 협업으로 새롭게 창작된 작품으로 아직은 과정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연을 봤을 때 이미 그 자체로서 일단 완결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대부분 남성 무용수들로 구성된 Marama는 마오리족의 저돌적이고 강력한 힘을 과시한다. 달의 변화와 함께 농사의 주기를 표현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출정을 준비하는 전사들의 춤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닥을 쿵쿵 울리며 전투를 준비하는 전사들, 문명의 세례에 때 묻기 전의 원시적인 강한 남성성을 과시하는 이들의 춤은 마오리의 전통춤인 하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Atamira Dance Company는 마오리의 전통 무용단이 아니라 컨템퍼러리 무용단이다. 이들의 춤은 마오리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컨템퍼러리 댄스와 효과적인 접합을 이루고 있다. 정교한 구성과 파워풀한 춤의 결합, 마지막 장면에서 근육질의 강한 남성 무용수들 사이를 유영하듯 부드럽게 흐르는 여성 무용수들, 달의 정기를 상징하는 듯한 여성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강한 남성성과 여성적 부드러움이 하나로 녹아드는 아름다운 장면이면서 창무회 단원들과의 협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춤에서는 백인이 지배하는 뉴질랜드 사회에서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마오리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느껴졌다.

  또한 Marama에서 주목할 것은 조명의 효과적인 사용이다. 첫 장면부터 조명은 어두운 밤, 일렁이며 흘러가는 듯한 달무리를 절묘하게 표현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무용수들보다 조명이 주인공이 되는 장면이었다. 그밖에도 어둠 속에서 좌우로 뻗은 무용수들의 팔은 명암을 분명히 가르는 조명에 의해 인간의 갈비뼈를 연상케 하며, 희생제물을 바치는 듯한 장면에서 여러 무용수가 한 사람의 얼굴을 받쳐드는 모습에서도 조명은 무용수들의 팔과 쳐들은 얼굴만 강렬하게 비추고 신체의 나머지 부분들을 어둠 속에 묻어버림으로써 그로테스크한 느낌과 함께 희생제의의 공포감을 조성한다. 이 작품에서 조명은 무용수들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조명은 단순히 춤추는 무용수들을 비추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조명의 효과적인 사용은 한국의 컨템퍼러리 댄스가 배워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이번 참가작들 가운데 조명 디자이너의 이름이 명시된 팀은 앞에서 분석한 호우잉의 The Moment와 뉴질랜드의 Marama 뿐이었다. 그만큼 두 작품에서 조명이 차지하는 역할이 중요했다. The Moment에서는 특히 첫 장면에서 무대바닥을 줄무늬로 나누는 조명이 뒷걸음질하면서 이를 사선으로 달려가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중국의 Hou Ying Dance Theater와 뉴질랜드의 Atamira Dance Company는 미국과 유럽 중심의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춤이 나아갈 방향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자신들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서구 중심의 컨템퍼러리 댄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테크닉의 개발만이 아니라 몸과 몸짓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과 함께 춤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관점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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