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상만 인권운동가

[고양신문] 제가 잊을 수 없는 사연을 접한 때는 2005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우연히 펼쳐든 모 신문 기사를 읽으며 저는 결국 눈물을 떨궜습니다. 사연 속 아이는 어느 지방의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십수 명의 학생들이 전교생인 학교에서 아이는 유일하게 자전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늘 걸어서 통학했다는 아이에게 소원이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자기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고 싶은 꿈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는 참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한 후 아이는 조부와 조모 손에서 자라고 있었고 형편이 어려워 자전거를 하나 사 줄 여력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딱한 사연을 접한 학교장이 몇몇 후원자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다행히 아이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후원자 몇 분이 돈을 모아 아이에게 자전거를 사주기로 마음을 모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전거를 받은 날, 아이는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고 합니다. 집으로 빨리 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자기가 받은 자전거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집으로 달려가던 길에 그만 사고가 난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아이를 운행 중인 자동차가 치었고 그것이 아이의 살아있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자전거. 그리고 그 자전거를 타고 달린 그 길이 아이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내용의 기사를 읽으며 저는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 왔습니다. 아이를 위해 울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울어서 아이의 영혼에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이후로 그 아이의 사연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운명적인 일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른바 ‘숙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할 수 없는 일로 인해 받아야 할 고통이 너무도 큽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면 아이 역시 가난한 아이로 취급 받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문제를 우리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났으니 그것이 아이의 숙명이라고 여겨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의 부모는 ‘태어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난한 아이든 넉넉한 집의 아이든 동등하고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런 동등하고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주체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국가 예산을 아이들을 위해 지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아픈 아이는 치료해 주고 또 배고픈 아이에게는 밥을 줘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아이들은 배울 수 있게 해 주고, 자고 싶은 아이에게는 잠을 잘 수 있는 집을 줘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의 삶과 미래가 그 부모를 따라 경제적 신분으로 ‘굳어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내 조국 대한민국이기를 저는 소원합니다. 그래서 “네 부모가 누구냐”가 아니라 “네 나라는 어디냐”는 질문이 자연스러운 나라가 제가 생각하는 진짜 나라입니다. 그 물음에 우리 모두가 당당하게 “대한민국입니다”를 외칠 수 있는 복지 국가. 내 조국 대한민국이 답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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