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 인문학 작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면 근대의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 근본동력은 인류가 세상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부터라고 말한다. 어디 과학혁명뿐이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평생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무지의 지’를 삶의 모토로 삼았으니, 지중해 주변을 정복하고 교만해진 아테네 시민에게는 소크라테스가 눈엣가시였으리라. 기실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너 자신이 모름을 알라”로 해석해야 맞다. 잘난 사람들의 권위를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칼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너나 나나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전제를 깔고 살아야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이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의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이며, 신이 아니라 신의 뜻을 묻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면, 좋은 삶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 좋은 삶 중 하나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치적 삶이었다. 생계의 문제가 개인과 가족의 문제라면, 정치는 공동체에 문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구는 “인간은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문제는 정치가 나에게 속해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나와 너를 포함하는 공동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내 편만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대화가 필요 없겠지만 너의 편도 끌어안고 가야하기 때문에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대화의 전제는 무엇인가? 대전제는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때,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따라서 정치는 나의 주장을 강변하는 일방의 자리가 아니라 너의 주장을 듣고 말하는 쌍방의 자리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정치는 진리게임이 아니라 소통게임이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전제는 나는 너를 모른다는 것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나와 너 사이에 무지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도 나는 너와 함께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너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이 지혜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파워게임이 아니라 상대방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토대에서만 생겨나는 산물이다. 그래서 다른 영역은 모르겠으되, 정치영역은 진리의 일방적 확장이 아니라 이질성의 활성화를 운동원리로 삼아야 한다. 침묵의 굴종이 아니라, 활기차고 다양한 발언이 생성되는 것이 정치이다.

진리(眞理)의 동일성이 배제되고 일리(一理)의 이질성이 활성화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정치를 하는 좋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현실 정치는 어떤가? 남과 북이 대화하려는 노력은 부족하고, 너 아니면 나라는 치킨게임을 조장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이나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그런다고 치고, 건강한 정신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남한의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조차 남의 일을 논평하듯이 전쟁을 조장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 치킨게임은 치킨 정도 수준에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 벌이는 것이지 좋은 삶을 추구해야할 정치인의 몫은 아니다. 사태가 심각할수록 대화의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좋은 삶을 추구하는 정치인의 자세다.

가깝게는 고양시에서 청년정책위원회를 구성하는데 그동안 청년기본조례 제정에 앞장선 청년들을 시당국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원 탈락시킨 사례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 정치인의 자세는 아니다. 어차피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로 정치지형을 구성하는 것은 정치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 정치를 죽이는 행위이다. 정치는 다름을 전제하고 이질성을 활성화시킬 때 좋아지는 것이다. 다름을 차단하고, 모름을 부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각성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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