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석 대명한의원장

[고양신문] 한 사람의 생을 단적으로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비유가 ‘소설로 몇 권이 된다’는 얘기다. 나도 어려서부터 그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계셨던 노인들 중 두 분이 벌써 이 생을 마감하셨다. 소설 여러 권이 사라진 셈이다.

많은 이들이 인생은 다 허무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특히 죽음은 치열하다. 사람이 떠날 때 얼마나 고통이 깊은지 가까이서 본 후로는 허무하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삶은 정직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물론 육신의 흔적이야 찾을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살아 온 세월을 통해 남긴 것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한도 쌓이고 원도 쌓이는 게 아니겠는가.

지나간 일이라고 묻어버리자며 차마 덜어내지 못한 지나 온 세월 때문에 쌓인 한이 너무 두터워졌다고 느낀다. 이제 그 두터운 세월을 조금씩이라도 걷어내고 털 것은 털어 보면 좋겠다. 요즘 들어 정치 보복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하면 해묵은 얘기를 꺼내 정치 보복을 한다고 선동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그들이 저지른 일을 잊지 않고 있어, 죄를 묻는 것이 정당하다고 한다. 재화는 유한하다. 가진 자가 있으면 반드시 잃는 사람이 있다. 하물며 국민들이 낸 세금, 그 피 같은 돈을 개인의 치부를 위해 쓴 사람을 용서해선 안 된다. 그것이 요즘 여론이고 정서다. 언론을 장악하고 그 언론을 앞세워 정권의 나팔수들이 불어대는 나팔소리에 홀려 무엇이 정의인지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제 정신이 되었다. 한참 멀었지만 세상이 바뀐 덕이다.

중용에 ‘君子以財發身 小人以財亡身(군자이재발신 소인이재망신)’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재물을 가지고 자기의 뜻을 펼치고 소인배는 재물로 자신을 망친다는 얘기다. 큰 재화를 가지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썼다면 얼마나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 사람은 사람들을 속여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을 이용해 국고를 탕진했다. 소인배의 전형이다. 아쉬운 것은 사람들이 이제야 속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아직 결정적 한 방이 없지만 범죄의 정점에 누가 있었는지 세 살 아이도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얼마 전 장인이 세상을 떠났다. 가진 것이 없이 맨 몸으로 가정을 이루고 산 피난민이다. 배운 게 없어 자식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베풀어주진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키셨다. 마지막에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며 고생을 하다 가셨지만 가시고 나니 살아계실 땐 잘 알지 못했던 장점들이 보인다. 가장 큰 것은 책임감이다. 자식들이 이 세상에 온전히 뿌리 내리고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셨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자기 몫을 해내신 것이다. 자기 그릇에 맞는 삶을 살다 가셨다. 그래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꿈꾼다. 성공이란 큰 부를 이루고 그 부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름 난 부자들이 꽤 많다. 그러나 밖에서 보는 그들의 삶은 그리 아름답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올바르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바르게 살지 않고 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한 번도 죄를 물은 적이 없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가 전도되고 범죄가 넘쳐난다. 큰 도둑이 권력까지 잡으니 나라 곳간이 남아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청산이란 걸 한번 해보면 좋겠다. 지나간 일은 묻는 게 서로에게 좋다며 그렇게 지나 온 세월, 그래서 한이 쌓이고 그 상처가 곪아 터질 때까지 왔다. 한의학에서는 상처를 도려내는 걸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과감히 도려내는 걸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고 남 욕될 소리 안하면 두려워할 것도 겁낼 것도 없다(心安而不懼)’는 성현의 말씀처럼 욕심 없이 사는 서민들이 억울하지 않게 살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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