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전 건국대 교

[고양신문] 조선 선조 때 통신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전란의 가능성을 보고했던 황윤길(黃允吉, 1536년 ~ ?)의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본관은 장수이다. 황희(黃喜)정승의 5대손으로, 호조판서 황치신(黃致身)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현령 황징(黃懲)이다. 당색으로 서인에 속하였던 그가 임진왜란의 발발을 정확히 예측하였지만, 당시 선조는 실세(失勢)한 서인들이 민심을 어지럽히려는 것으로 판단해 그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을 거쳐 1567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병조참판을 지냈다. 이때 마침 일본이 조선과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과거제나 중앙집권과 같은 선진 정치체제를 아직 갖추지 못한 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을 막 평정하고 내부의 넘치는 힘을 대륙 침략에서 그 돌파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선조는 이 같은 일본의 실제 상황을 확인할 목적으로 황윤길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임명하고 수행원 200여 명을 대동케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다. 하지만 당파싸움이 본격화되던 당시 서인과 동인으로 당색을 달리하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은 출발에서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며 갈등하기 일쑤였다. 황윤길이 대마도를 거쳐 관백(關伯)이 있는 교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각 도시들을 지나며 경탄을 금하지 못하는 반면, 김성일은 미개국가 일본의 문물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두 사람의 갈등은 귀국 후 선조 임금께 보고하는 과정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먼저 황윤길이 “반드시 전란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김성일은 “신은 그와 같은 정황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다시 선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상이 어떤지를 묻자 황윤길이 “그의 눈빛이 밝게 빛나 담략과 지혜가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라고 하자,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고 얼굴은 원숭이와 같으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듯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에는 두 사람 간의 생각이나 성격의 차이라기보다는 동인과 서인 간의 세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다. 

이들 두 사람이 임금 앞에서 물러 나오자 곁에 있었던 이조판서 유성룡이 김성일을 붙잡고 “그대의 말이 황윤길과 다른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하겠소?”라고 묻자, 김성일이 “내 어찌 왜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현혹되므로 이를 풀어보려는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실제로 당시 민심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고, 동요하는 민심을 보다 못한 지방의 수령방백들은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의 도적떼가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다. 한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는 내용과 함께 내치에 힘써 줄 것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리기에 바빴다.

1592년 실제로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야밤에 의주로 피난을 떠나야 했고, 학봉 김성일은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지만 순국하였다. 왜군이 쏘아대는 조총(鳥銃)의 위력 앞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초토화되는 사이, 전란의 위험을 경고했던 황윤길은 졸(卒)한 연도도 확인되지 않은 채, 쓸쓸히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에 묻혀야 했다.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가 혼란할수록 과거를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전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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