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 빛 시 론>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얼마 전 선배하고 술을 마시다 마지노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술 마신 지 꽤 지난 시간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마치 한소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 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퇴행한 민주주의의 복원을 염원하면서 회의감이 든 적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엄청 많은 사람이 모여 최고 권력자의 퇴진을 외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할 때 감동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속수무책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되돌아보면, 기회는 있었다.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에 나왔을 적에 도덕성에 흠이 많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성장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수가 그의 당선을 도왔다. 운하사업을 4대강 사업이라 호도하더라도 그냥 넘어갔다. 고소영, 강부자라는 말이 회자할 정도로 정실인사를 했건만 눈감아 주었다. 방송을 장악하려고 무리수를 두는데도 외면했다.

기회는 또 있었다. 보수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고 개혁세력에게 국가경영의 기회를 주고 진보세력이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면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박근혜가 정권을 잡았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 탄생은 처음부터 의혹투성이었다.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을 달며 여론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이후 이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려는 검찰이 치도곤을 당했다. 박정희의 유령이 되살아나고, 곳곳에서 부패의 악취가 났다. 그래도 지지율은 높았다.

밀리고 밀리다 더는 밀리면 안 되는 지점에서 시민의 저항이 폭발했다. 더는 역사적 퇴행을 못 본 척할 수 없고,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사회를 되찾고자 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온갖 술수를 부려도 이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민주주의의 마지노선에 서서 이를 지키려는 용맹한 싸움이었다. 결과는, 벼랑 끝에 서서 이루어낸 극적 반전이었다. 이 저항의 역사적 가치를 깎아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그 선까지 밀리도록 무엇을 했냐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바로 마지노 민주주의라는 말이 상징한다고 지레 짐작했다는 뜻이다.

다음날 인터넷에서 마지노 민주주의를 찾아보았다. 소준섭 박사의 글이 떴는데, 그 내용은 내가 짐작한 것보다 더 두터웠다. 그는 이 말이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불굴의 저항정신”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미성숙한 현실”을 상징한다고 아프게 지적했다.

그는 우리사회의 기득권이 자기 권한을 마지노선 끝까지 행사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이에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는 삶 전체를 걸고 투쟁하지만 이길 확률은 희박하다. 그러다 권력의 극단적 형태가 나타날 때 “불의한 권력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고 말했다.(‘공론화’ 없이 민주주의 없다. 프레시안 2017.10.12. 참조)

어느 시기이든 시민사회가 동의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권력에는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저항이 민주주의의 마지노선에서 벌어지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마지노선까지 밀릴 때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의 마지노선에 걸려 울부짖었던가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그 누구도 삶의 마지노선이라는 최악의 궁지에 몰리지 않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10년 동안 고통 받거나 목숨을 버린 이들을 생각하면 나부터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노 민주주의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고 뽐내지 말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최근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 위원회를 지켜보며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야말로 마지노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아닐까 싶었다. 한 백과사전을 보니, 숙의민주주의를 ‘시민 간에 이루어진 공개 논증과 토론의 결과를 국가 권력의 잠정적 의사결정과정에 반영하는 민주주의’라 풀이했다.

일찌감치 김종철 교수는 깊은 민주주의라 하며 숙의민주주의를 줄기차게 소개해왔고, 소준섭 박사도 “국가 중요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공론화과정은 지금 허울뿐인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질적 전환시키고 비약시키는 시금석”이라 했다.

설령, 숙의민주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면 어떤가.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함께 숙의해보면 되는 법이다. 더 늦기 전에.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