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700주년 맞는 최영(崔瑩) 장군의 생애

[고양신문]  ‘자신의 삶에 탐욕이 없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그의 유언대로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한 그의 무덤에는 1970년대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는 적분(赤墳)이었다. 1316년에 탄생한 최영 장군의 탄생 700주년을 기념해 고양시와 고양문화원은 최영 장군 기념비를 건립했고, 올해로 19회째 이어지는 ‘최영장군위령굿’을 실시하며 뜻을 기리고 있다.|
 

고양시와 고양문화원이 세운 최영 장군 탄생 7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이 지난 21일 열렸다.


최영의 좌우명, 견금여석(見金如石)

최영(崔瑩, 1316~1388) 장군 탄생 700주년을 맞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많아지고 있다. 고즈넉한 산길을 걸어 계단을 밟으며 산 위로 올라가면 하나의 곡장 안에 두 개의 무덤이 있다. 앞의 것이 최영 장군의 무덤이고 뒤의 것이 사헌부 간관을 지낸 부친 최원직의 무덤이다. 16세의 아들을 두고 세상을 하직해야 했던 부친 최원직은 아들에게 견금여석(見金如石)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최영은 부친의 유언을 띠에 새기고 반드시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도 부친의 유언을 지켜낸 자신감일 것이다.

최영의 가문은 고려를 개창한 왕건을 도운 철원 최씨(동주 최씨라고도 함)로서, 최영의 5대조인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해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혀 무장의 길을 걸은 최영은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 됐다.

그는 공민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 호군(護軍)으로 출세했다. 또한 원·명 교체기라는 혼란스런 국제 정세에서 중국으로 출정해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원나라로부터 되찾는 데 일조했다. 이때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왜구를 떨게 만든 백수 최만호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왕실과 고려의 백성들을 지켜낸 대표적 장군이었다.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고, 그때마다 최영은 흰 머리칼을 휘날리며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해 백수(白首) 최만호(崔萬戶)라는 별명을 얻으며 백성들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또한 중국의 농민 반란세력인 홍건적이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오자 이를 격파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기도 했다. 또한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했고, 원나라의 추대를 받은 덕흥군이 보낸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했다. 최영 장군은 이처럼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환란에 동분서주하며 고려왕실과 국가의 보호자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요동정벌, 최영이 국제정세에 무지했기 때문인가

고려멸망과 최영 장군의 삶을 마감하게 했던 결정적인 사건이 요동정벌이다. 만약 최영이 이성계와 함께 요동정벌을 떠났다면 어찌되었을까? 중국의 정세도 살피고 온 최영이 국제정세에 어두워 요동정벌을 감행했다는 평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오히려 상황을 잘 이용해 쇠퇴해가는 고려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고려개국에 일조한 가문의 출신으로서 신의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부친의 유언을 평생 동안 지키려고 노력한 최영의 강직한 성품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우왕과 함께 추진한 요동정벌은 어렵게 되찾은 쌍성총관부 일대의 땅을 내놓으라는 명나라의 요구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었고, 성공했다면 우리의 강토가 한반도로 국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을 것이라는 최영의 판단도 틀렸다 할 수 없고,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이고,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면 남쪽에 왜구가 들끓을 것이고,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이성계의 주장도 틀리지 않았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는 우왕의 만류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고,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이성계가 모든 군사를 이끌고 갔다. 하지만 이성계가 군사를 돌이켜 개경으로 돌아오는 ‘위화도 회군’ 사건이 일어났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을 탈취해 조선을 건국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개경으로 압송돼 참형 됐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이 지난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했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무속 신앙에서 추앙받는 최영 장군

최영은 고려 왕조의 쇠망과 함께 목숨을 빼앗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백성들은 그의 충절과 용맹한 업적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특히 무속인들 사이에서는 추앙의 대상이 됐다. 그가 참수됐을 때 개성의 시장이 철시하고 백성들은 성계육을 먹으며 이성계 일파를 미워했다고 한다. 백성들이 얼마나 최영 장군을 믿었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가 됐다. 왜구와 홍건적들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던 최영을 장군신으로 다시 부활시켰고, 조선시대 이래 최영은 전국적으로 널리 숭배 받는 신이 돼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최영장군 탄생 기념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참가해 긴 세월을 건너 전해오는 장군의 충절과 용맹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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