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시민인가>

조정 고양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웃과 함께 일상의 현장에서 시민다운 삶을 살아가는 ‘어떤 시민’에게 다가가는 시간. 다섯 번째 만난 주인공은 고양환경운동연합 조정 공동대표다. 아름다운 언어를 고르는 시인이며 동화작가인 그는 동시에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싸움부터 고양의 산황산을 지키는 싸움까지, 가치를 발견하고 애정을 품은 일에 뜨거운 에너지를 쏟아붓는 운동가이기도 하다. 진솔한 속내를 감춤 없이 풀어 낸 이야기는 기대만큼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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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신문] 내 부모님은 전라남도 영암 분들이다. 아버지가 장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계실 때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 첫 날 어머니에게 “6·25 때 희생당한 친구들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당부했단다. 영암은 6·25를 치르며 학살당한 숫자가 1만2400여 명에 이른다. 젊은이들이 좌·우 구분 없이 어마어마하게 희생당한 것이다. 전쟁 전 아버지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있는데, 사진에 등장하는 59명의 친구 중 달랑 5명만 살아남았다고 하셨다. 부모님이 친구들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막연히 이어졌다. 학교에서 특별활동 부서를 결정할 때마다 항상 자연스럽게 문예반을 선택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 서 있는데 ‘나는 나중에 시인이 되겠지?’라는 문장 하나가 홀연히 내 안에서 떠올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냥 그렇게 되겠지 싶었다.

복잡한 내면 중첩된 젊은 시절

75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유신 반대 데모가 극렬하던 시절이었다. 김상진 열사의 자결을 가까이서 목격할 정도로 학생운동 주변에 머물긴 했지만, 겁이 많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경찰에 잡혀가면 “어차피 불 거니까 절대 고문하지 말아 달라” 부탁해야겠다고 평소 생각하곤 했다(웃음).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자랐지만, 20대 중반에는 무척 염세적이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전혜린의 책을 읽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지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시를 쓴다는 것도 다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반대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고 싶어 함석헌 선생과 같은 사상가를 찾아가기도 하고, 기도원에 열심히 다니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도 엄격해 40대가 되도록 술집이나 노래방에도 한번 못 가봤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가치가 혼재된 시간을 견디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40대 중반 신춘문예로 등단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만나면서부터다. 80년대에는 장애인인권운동에 관여하기도 했고, 이후에는 막 시작된 유기농 바람을 타고 도농직거래 활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돌아보니 하나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면 5년 정도 열심히 참여한 것 같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전반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며 게으르게 살았다. 판화 작업을 하는 고종사촌이 “배부른 돼지로 사는 게 좋은가?”라고 달랑 한 줄 적은 엽서를 보내 내 자존심을 건드린 적도 있다(웃음). 그러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95년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내가 쓴 시 몇 개를 추려 달라기에 건네줬더니 나 대신 모 신문 신춘문예에 응모를 해 버렸다. 그 작품이 덜컥 최종심에 올라 ‘내 글이 공식적으로도 시가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그해부터 매년 꾸준히 응모를 해 2000년 44살의 나이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제주 찾았다가 강정마을 싸움 뛰어들어

이제 강정을 말해야겠다. 최근 나는 해군기지가 들어서며 망가져버린 제주 강정마을의 아픈 이야기를 담아 『너랑 나랑 평화랑』이라는 동화책을 펴냈다. 몇 해 전 ‘오마이뉴스’에 연재할 때는 강정의 싸움이 패배로 기울던 때라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쫓기며 일주일에 한 편씩을 정신없이 써냈다. 당연히 날선 문제의식과 목적성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른 후 책을 내며 그런 부분을 많이 빼고 다듬었다.

내가 강정마을에 처음 간 건 2011년 4월이다. 4·3을 공부하며 한창 제주에 매혹을 느끼던 시절이라 자주 제주를 찾곤 했는데, 차를 빌려 혼자 돌아다니다 우연히 강정마을에 들렀다. 노란 깃발이 마을을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 여기가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마을이구나, 생각했다.

마을에 들러 주민들을 접하고, 제주의 작가들을 만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정부의 일방적인 폭력이 황당하고 화가 났다. 강정 바다는 우리 국토의 몇 안 되는 절대보전지역이다. 말 그대로 어떤 경우에도 개발이나 훼손이 될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처음으로 그 원칙이 깨지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순서는 뭘까? 설악산이든 어디든 더 이상 안보, 또는 자본이라는 이유로 자연이 파괴되고 주민들의 삶이 흩어지는 걸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강정의 아픔

강정의 싸움에 뛰어들 당시 한국작가회의 여성인권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왕 뛰어들었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자고 각오를 세웠다. 누군가에게는 해답을 듣고 출구를 찾을 수 있겠지 여기며 주말마다 열심히 제주를 들락거리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에게도 답을 들을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 초기라 야당인 민주당 쪽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주길 기대했지만 모두들 정치적인 수사만 늘어놓았지, 해결의 의지가 없어보였다. 알고 보니 강정 해군기지 추진이 참여정부 때 결정된 사안이었던 것이다.

무작정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전단지도 돌리고, 언론을 두드리며 칼럼도 쓰고, 시도 쓰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전국의 작가들을 조직해 임진각에서 강정마을까지 도보로 순례하는 행사도 벌였다. 하지만 강정을 조금만 벗어나도 제주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냉랭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제주 교육환경이 좋아진다거나, 허공에 씨 뿌리듯 늘어놓은 개발 약속들을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너무 뻔한 문제들을 당사자들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강정에서는 마지막 시도는 새누리당 후보의 제주지사 당선 저지였다. 하지만 제주 시민단체의 암묵적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원희룡씨가 제주도지사로 당선됐고 해군기지는 급물살을 탔다. 정권이 바뀌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강정 주민들에 대한 구상권 문제 등의 해결 의지조차 불분명하다. 몇 년 만에 책으로 묶기 위해 연작 동화를 마지막으로 교정 볼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름다운 자연이 망가지고, 마을이 완전히 토막나버린 강정의 현실이 새삼 떠올라서다.
 


젊은 세대 열정적 경험 쌓았으면

수년 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떤 싸움을 하는데, 고맙게도 고양환경운동연합이 도움을 줬다.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지금은 공동대표까지 맡게 되었다. 조금은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 모임이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고, 환경에 대해 폭넓게 공부하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다.

돌아보니 내 스스로 늘 삶의 답을 고민했지만, 동시에 늘 보이지 않는 틀 속에 나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온 것도 같다. 고향에서는 양반집 후손이라는 가치관을 주입받으며 컸고, 앞서 말했듯 기독교적 자기 검열도 있었고, 크고 작은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은 ‘운동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덕성’이라는 또 다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닌 규정이 늘 옳은가, 사람을 이해하는 데 보편적인 기준이 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붙들고 있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절감한다. 나는 여전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미숙하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을 보면 마음껏 연애도 하고, 누군가와 싸움도 하고, 실연도 당해보며 모든 인간적 경험을 다 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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