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임진왜란 당시 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류형(1566~1615) 장군의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조부 유진동(柳辰同)은 공조판서를 지낸 문무겸전한 인물로 무술과 서화에 뛰어났다. 또한 부친 용(溶)은 우봉현감 때 대도 임꺽정(林巨正)토벌에 공을 세우는 등, 지용(智勇)을 겸비한 목민관이었으나, 함경도 경원부사로 재임 중 44세를 일기로 일찍 돌아가니 이때 류형의 나이 겨우 3세였다.

천부적으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류형은 한 때 혈기에 넘쳐 학문을 멀리하고 무술에만 전념하였으나, 모친의 간곡한 훈계에 크게 깨닫고 당대 대학자인 우계 성혼(牛溪 成渾), 훗날 인조반정의 주역이 되었던 묵재 이귀(默齋 李貴) 등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그의 나이 27세가 되던 해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이 터졌다. 그리고 단 20여일 만에 전 강토가 초토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참지 못한 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던 중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 격퇴에 앞장섰다.

다음해인 선조 26년, 그는 임금의 경호임무를 담당하는 행재소(行在所)에 들어가 선전관이 되었다. 이때 공무로 이순신 장군이 있는 통제영(현 한산도)으로 출장을 가게 될 인물로 유형이 뽑혔다. 충무공과 류형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처럼 우연한 계기로, 아니면 어떤 숙명적인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던 충무공은 이때 류형의 인물됨에 보고 장래에 큰 재목감으로 점쳐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류형은 나이 29세던 해에 무과별시 을과에 급제하였고, 나라에 대한 충성을 한 시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등에 새기고 다녔다.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 당시 주요 전투 지역은 전라도 남해안 및 경상도 해안선 일대로 전선이 압축되어 있었다. 이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휘하에 경상우수사를 비롯하여 순천, 장흥, 진도 등의 군수와 당진, 안골포 등의 첨사(僉使)등을 거느리고 수륙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류형은 해남현감으로 가장 낮은 품계에 속하는 직위였으나 충무공 휘하에서 제일가는 선봉장으로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크게 용맹을 떨치며 전공을 세웠다.

1598년 11월19일,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을 향한 운명의 날이 밝자 노량해변은 이른 아침부터 철군을 서두르는 왜선과 이들의 퇴로를 막아 섬멸하려는 조,명 연합군의 배들로 가득하였다. 싸움이 최고조에 이르러 선봉으로 나섰던 류형 장군이 무려 5발의 적탄을 맞고 의식을 잃자 충무공은 “이제 다 틀렸구나, 큰일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류형 장군이 얼마 후 깨어났을 때, 충무공은 이미 독전 중 적탄에 맞아 전사한 이후였다. 류형 장군은 대성통곡, 상관을 잃은 비통함속에서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여 7년간의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년 뒤인 1602년(선조35년) 류형 장군은 제 5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류형 장군은 자신의 승진이나 영달보다는 충무공의 현창(顯彰)과 그의 가족 돌보기에 진력하였다. 또한 자신의 임종 직전에는 “충무공의 묘비를 세우기전에 결코 나의 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까지 남겼다. 없든 일도 만들어 상관을 음해하고 끄집어내려야 자신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믿는 오늘의 세태에 실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류형 장군의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698번지에 있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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