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조선의 제4대 왕위에 오른 세종(1397~1450)은 태조 6년,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다. 1418년(태종 18) 6월에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에 책봉됐다가, 두 달 뒤 태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이같은 세종이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문화, 학술 등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다진 성군으로, 오늘의 후손들에게 길이 추앙받을 수 있게 된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22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세종은 스스로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어깨를 겨뤄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학자였다. 하지만 국말, 국초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는 자신의 왕좌도 하나의 사상누각으로, 자신의 비전을 실행에 옮겨 줄 인재들이 없다면 자신이 바라는 태평성대 역시 물거품으로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세종이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와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에 바탕을 두고 전 백성을 하나로 묶는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을 펼치는 길이었다.

세종대에 크게 쓰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능력과 청렴, 성실도 등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평소 그가 얼마나 포용과 화합을 염두에 두고 인선에 고민했는지 엿볼 수 있디.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다. 또한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이 있었다. 세종대에 유독 뛰어난 과학자, 음악가, 장군 등이 많이 나타난 이유는 이처럼 세종이 포용과 화합을 바탕으로 인재를 폭넓게 발탁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에서 비롯됐다.

세종과 거의 평생을 같이한 인물로 황희와 맹사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전조(前朝)의 인물들로 황희는 영의정만 18년간 역임할 정도로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맹사성은 80세가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자문을 구할 만큼 존중하는 신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처음부터 세종 편에 섰던 것은 아니다. 황희는 두문동 출신으로 세종의 즉위를 반대하다 5년간이나 유배를 다녀와야 했고,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로 전조와 인연이 더 깊다. 또한 황희는 역신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는가 하면, 금붙이를 뇌물로 받는 등으로 청백리로서의 명예를 훼손시키기도 했다. 세종에게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이들의 기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종의 포용과 화합정책의 최종 목표는 백성에 대한 애민(愛民)에 있었다. 한글 창제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글을 쓸 줄 몰라 호소조차 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 문자의 힘을 주려는 진정한 인간 사랑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세종은 관가의 노비에게 부부합산 160일의 출산휴가를 줬고, 남녀를 막론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궁궐에 초청해 기로연(耆老宴)을 베풀고 대접했다. 농가의 세법(공법)을 개정하기 위해 현장의 소리를 듣는 여론조사를 시행했고, 천민 출신 장영실을 기용해 천문과학을 발전시켜 농업에 응용하는 한편, 악사 박연을 등용해 예악(禮樂)을 정비시켰다.

당시 세종이 국말, 국초의 혼란 상황에서 야기되는 정치적 갈등을 계속 정치적으로만 풀려고 했다면, 끊임없는 정쟁으로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금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종의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이 결코 필자만의 기우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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