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오랜만에 하얀 눈 밑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농장을 둘러보았다.

눈에 덮여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밑에선 다양한 작물들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가끔 산책 삼아 농장에 들러 작물들이 겨울을 잘 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곤 한다. 그러나 작물들은 흙 속에서 겨울을 견디기 때문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에 심은 작물들이 겨울을 잘 나고 있겠지 위안을 얻으며 봄을 기다린다. 기다림이 있기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농장에 설렘이 깃든다.

이제나 저제나 봄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느 날 문득 마늘과 양파가 새초롬한 머리를 내민다. 물론 그중에는 혹한을 이기지 못하고 듬성듬성 빈자리도 눈에 띄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시금치도 흙을 밀어 올리며 이파리를 피워 올리고, 다년생인 부추와 대파도 기지개를 켜듯 싹을 내민다. 달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늘하늘한 싹을 틔우고, 봄나물들도 지천에 푸른 자태를 드러낸다.

농사를 짓는 이들 눈에는 텅 비어 삭막한 겨울 농장에서도 그 모든 풍경이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세찬 겨울바람을 맞아가며 애틋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농장을 둘러보게 된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작년 겨울 촛불을 켜고 혹한을 녹여낸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니 이런저런 기대감에 마음이 설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든 기대감은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다. 이 땅에 비정규직이 만들어진 지도 어느새 이십 년이 넘었다. 중학생들의 장래희망 가운데 하나가 정규직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고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피와 눈물을 빨아먹고 유지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추악한 범죄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비정규직을 없애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들이 있다.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우기는 격이다. 진짜로 나라가 위태로운 건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봄에는 비정규직이 사라지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폭력에 아무도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임금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도 자취를 감추었으면 좋겠다.

겨울농장에서 꿈꾸는 또 다른 바람은 집 없는 서러움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는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소유의 개념을 벗어던지고 모두가 무주택자가 되는 세상을 그리워하면 너무 과격한 것일까. 거리에 설치된 자전거를 누구나 자유로이 빌려 타듯이 집 또한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곳에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존재한다면 누구나 부동산의 노예에서 벗어나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일들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넘어야할 무수한 산들이 엄혹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987년 유월항쟁 이전만 하더라도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된 세상에서 사는 건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었다.

그래서 겨울농장에 서서 눈에 덮인 텃밭을 바라보며 자꾸만 꿈을 꿔보는 것이다. 청년들은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하고, 노인들은 더 이상 종이상자를 줍지 않고, 경의선을 타고 백두산에 오르고, 도농격차가 허물어지고, 무상의료가 현실이 되고, 원전사고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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