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고려시대 북방의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거란과의 화친론을 뒤엎고 주전론을 폈던 서희(942~998) 장군은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염윤(廉允), 시호는 정민(貞敏)이며 본관은 이천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총명했던 그는 광종 11년, 19세의 나이로 급제해 광평성의 원외랑 등을 지내며 승진을 거듭했다. 그의 나이 31세 때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후 협상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는 수많은 외세 침략과 수난으로 점철돼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다. 고려는 전 역사를 통해 거란과 몽골을 비롯해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고, 남쪽의 왜구마저 고려를 그냥 두지 않았다. 외적 가운데 고려를 가장 먼저 침공해 온 나라는 거란이다. 고려 초기 고려와 거란은 서로 통호했으나 거란이 고려의 형제국인 발해를 멸망시키자, ‘구맹(舊盟)을 저버린 자들이라 판단‘ 국교를 끊은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그대로 차지한 거란은 국호를 요(遼)로 바꾸며 중원을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어느덧 중국 대륙은 기존의 송나라와 요(거란) 간에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거란으로서는 송나라와 동맹관계에 있는 고려가 항상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간 발해의 패망 이후 북방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고려가, 언제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거란으로서는 자신들이 송나라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를 굴복시켜 배후의 세력을 끊어놓거나, 아니면 고려와 동맹관계를 맺어두는 방법뿐이었다. 993년 고려 성종 12년, 마침내 거란의 동경(東京) 유수 소손녕이 압록강을 건너와 고려의 봉산성을 점령하는 거란의 1차 침공이 일어났다.

소손녕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자신들의 군사가 80만 대군에 이르니, 고려는 무조건 항복하라고 협박했다. 당시 고려는 이른바 둔전제의 실시로 상비군이 절대 부족한데다, 병사를 아무리 모아도 전투 가능한 병사 6만 명 선을 채우기 어려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거란을 대적해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평양) 이북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친하는, 할지론(割地論)쪽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었다. 이때 중군사의 자격으로 거란의 입장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던 서희 장군이 조정의 할지론에 반대하며 자신이 적장과 단판에 나설 것을 자청했다.

서희가 소손녕의 진영으로 찾아가자, 그는 옛 고구려의 땅을 자신들에게 돌려줄 것과, 송(宋)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다시 통호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으로 국경을 따진다면 거란의 동경(현 요동반도) 일대가 모두 고려의 땅이다, 또한 거란과 당장 통호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족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여 리(강동 6주)에 있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영토를 개간하는 데 거란이 협조한다면 고려는 당장에라도 거란과 통호할 수 있다며 소손녕을 설득시켰다.

거란이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도 고려와 송나라를 동시에 상대해 싸울 수 없다는 거란의 약점을 파고든 전략이었다. 이듬해 서희는 강동6주에 성을 쌓고 우리 영토로 편입시켰다. 당시 거란의 침입은 분명한 위기였으나 이를 기회로 삼아 영토 확장이라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정민공께서 오늘날 미국과 중국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의 외교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실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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