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이웃> 안상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날개

안상수체 만든 최고의 시각디자이너
2013년 파주출판도시에 독립학교 문 열어
창조적 디자인교육 산실로 이목 집중

 

한국을 대표하는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날개(교장)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디자인하고 있다.


[고양신문] 안상수는 한국에서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누군지 모르겠다고? 그럼 달리 설명을 해보자. 컴퓨터에 깔린 한글 프로그램 기본 서체로 들어있는 ‘안상수체’를 아시는가? 많은 이들이 아하, 하고 무릎을 칠 듯. 그 서체를 디자인한 이가 안상수다. 한글의 네모꼴 디자인을 과감히 파괴하면서도 간결하고 품격 있는 멋을 지닌 안상수체는 여전히 가장 창조적인 한글 글꼴로 각광받는다.

30대 초반에 안상수체를 개발한 그는 디자인회사 대표, 홍익대 교수 등을 거쳐 2013년부터 파주출판도시에 문을 연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이하 파티)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첫 한배곳(대학과정) 졸업생을 낸 파티는 관행과 서열에 젖은 우리나라 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시작하며 ‘안 대표님’ 또는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르자 그는 자신을 ‘날개’라 불러달라 요청했다. ‘날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선생님’ 자도 떼어달란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가 편안해진다. 누운 반달 모양 안경 너머 진지한 눈동자를 빛내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이끄는 흡인력이 그에겐 있었다. 디자이너이자 실험적 교육자, 생명평화운동가 등 다양한 면모를 풍기는 안상수와의 인터뷰는 그의 독특한 서체처럼 간결하면서도 깊은 멋을 엿보는 시간이었다.
 

파티에서 출간한 책들. <사진제공=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 파티를 ‘멋짓 배곳’이라고 부르는데, 무슨 뜻인가.

‘멋지음, 또는 멋짓을 배우는 곳’, 디자인스쿨의 순 우리말인 셈이다. 배곳이란 말의 원조는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다. 한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던 조선어강습원을 ‘한글 배곳’이라 부르고자 했던 주시경 선생의 정신을 파티가 계승하려는 것이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해 파티는 모두 다섯 분의 큰 스승을 모시고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 금속활자를 보급한 구텐베르크, 한글 타이포그라피의 개척자 이상,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다.

세종을 모신 이유는 한글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기능적,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편의성, 효용성 등 한글은 모든 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유일무이한 디자인이다.

■ 스스로를 '날개'라고 부르는 이유도 궁금하다.

교육에서 가장 뛰어넘어야 할 게 권위주의인데, 권위주의는 호칭에서부터 우리를 규정한다. 호칭은 위계의 상징이다. 교장, 학장이라는 호칭에는 이미 체제 속에서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관습과 규정성이 담긴다. 그것을 넘어 새로운 이름을 만들면 새로운 관계가 자연스레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파티에서는 교장을 날개라고 부르기로 했다. 배우미(학생)와 스승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하는 이가 교장 아닌가.
 

파티 날개집의 벽면에는 그의 작업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사방에 가득하다.


■ 이상은 왜 큰스승으로 모시는가?

이상은 시인, 건축가, 낭만적 예술가 등 관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디자인적으로는 우리나라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개척자다. 타이포그라피란 글자를 다뤄 조형적 디자인을 시도하는 행위인데, 이상은 손으로 글자를 쓸 때부터 자신의 시가 신문에 어떻게 박혀 나와야 하는지를 상상하며 쓴 분이다. 곧 활자 표현의 예술적 묘미를 본능적으로 즐긴 시인이다. 친구들 책을 디자인해주고, 잡지 제호 표지 현상공모에서 당선되기도 했는데, 지금 봐도 굉장히 멋있다.

 

그는 인터뷰하는 도중 물을 데워 차를 우려내 자주 따라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전자와 찻잔, 받침대 등 다기의 재질과 종류가 다 제각각이다. 차를 즐기는 이들이 대개 세트로 구성된 다기를 사용하곤 하는데, 안상수 날개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듯했다. 다기뿐 아니라 인터뷰를 진행한 날개집(교장실) 내부 풍경이 무척 자유분방하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작은 벼루에 먹을 갈아 가는 세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어지는 기사에 소개되는 생명평화무늬도 직접 손으로 그려가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안상수 날개는 인터뷰 도중 수시로 작은 드로잉북을 펼치고 세필에 먹물을 찍어 그림을 그리곤 했다.


■ 디자이너로서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이력을 소개해 달라.

66년 전 충주에서 태어났다는 게 제일 중요한 이력이 아닐까. 결국 묘비명에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것과 언제 죽었다’만 남지 않겠는가.

굳이 이력을 꼽자면 안상수체 만든 것, 독일 라이프치히시가 수여하는 구텐베르크상을 수상한 것 등을 들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생명평화무늬를 디자인한 것을 꼽고 싶다. 20세기 평화운동의 심볼은 핵과 전쟁을 감축하자는 뜻을 담았다. 오늘날에는 단순히 전쟁 반대를 넘어서 인간을 초월한 범 생명적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 21세기 평화운동의 모습이다. 인간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에 생명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지리산에서 밤샘토론을 벌였는데, 그 이후 생명평화 5년 순례가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돌아와 이 순례에 참가했던 나에게 생명평화운동의 심볼을 부탁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그림이 바로 생명평화무늬다. 사람과 네 발 생명, 물에 사는 생명과 하늘에 사는 생명, 그리고 푸나무(식물)와 해와 달. 모든 생명의 속성이 하나로 연결됐다는 의미를 담았다.

우주 아래 모든 생명들이 제 자리에 있는 상태가 평화다. 사람이든 뭇 생명이든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제자리를 뺏기거나 이동을 강요당할 때 평화가 깨진다.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듯 이 그림을 그린다.
 

안상수 날개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작품으로 여기는 생명평화무늬.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인간을 아우르는 생태계의 '제자리 지킴'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안상수 날개는 생명평화무늬 외에도 갑골문 한자 등을 수시로 드로잉하며 유연하면서도 진지하게 존재와 생명, 삶과 멋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인간의 삶을 보다 아름답고 멋지게 만들어가는 모든 행위가 결국 디자인이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디자인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 파티에 대해 좀 더 들려달라.

비인가 독립 학교다. ‘대안’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감이 있어 의도적으로 ‘독립 배곳’이라는 말을 쓴다. 한배곳(대학과정)은 한 기에 30명, 더배곳(대학원과정)은 10명 정도를 뽑는다. 파티는 사실 100여 명이 출자한 교육협동조합이다. 올해부터는 재학 배우미, 마친 배우미들도 조합원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한다. 졸업 후에도 파티라는 이름으로 연관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장기적으로는 파티를 중심으로 밥집, 공방, 창업회사 등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위성 협동조합을 파생시키고자 한다. 각각은 서로 연결되며 일터를 하나의 생태계로 만들어가는 것이 꿈이다. 현재 파티 파생 협동조합 1호인 식당 ‘동네부엌 천천히’가 식당의 생존 실험선이라는 3년을 넘기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파티의 픽토그램 위크숍 장면. <사진제공=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 지역을 기반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파티를 설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티는 ‘학교 디자인 프로젝트’다. 우리말로 하면 ‘배곳 멋짓 사업’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며 글의 소통과 사람들의 관계를 디자인했듯, 함께 하는 스승들과 배우미들, 얼벗들이 중심이 돼 파티라는 공동체를 함께 디자인해가고 있을 뿐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파티가 자기 삶을 자기가 디자인하는 능력을 배워 나가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 결국 배우미들의 행로를 통해 파티가 가야 할 길이 결정될 거다. 그 과정을 함께 비틀거리며 가는 거다.
 

파티의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고 배우려면 꽤 큰 강의공간이 필요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파티의 캠퍼스 위치와 규모가 궁금해졌다. 안상수 날개는 빙긋이 웃으며 노란색 책자 형태의 ‘파티 배곳 설명서’의 한 면을 펼쳐보였다. 파주출판도시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군데군데 붉은 색 영역이 표시돼 있었다. 파티가 세를 얻어 활용하고 있는 출판도시 내의 다양한 공간들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형의 건물이나 소유 없이 파주출판도시 전역을 파티의 유용한 배움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티의 더배곳 '길 위의 멋짓' 수업 후 책 'BB: 바젤에서 바우하우스까지'를 펴내는 과정. <사진제공=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  파주출판도시는 파티에게 아주 고마운 터전인 듯하다.

파주출판도시 전체가 파티 캠퍼스다. 출판도시 지도 위 빨간 점들이 지금 공간을 기부받거나, 우리가 세를 얻어 점거(?)하고 있는 곳인데, 5년만 지나면 지도를 빨간 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한테 그냥 내 준 공간도 여러 군데다. 열화당은 책박물관을 파티 학생들에게 개방한다. 가까이에 있는 활판공방이나 한국영상자료원 파주센터도 교육 과정의 훌륭한 아카이브가 된다. 가까이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역시 국제회의장, 게스트하우스, 지혜의숲, 식당 등시설이 완벽하지 않나. 게다가 편집자, 저자, 출판기획자, 영화산업종사자 등 스승 자원도 풍부하다. 파주출판도시라는 물리적 터전이 없었으면 파티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출판도시야말로 파티와 같은 형태의 독립교육기관에겐 도시전체가 천혜의 캠퍼스다.

■ 파티 5년의 결과물이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파티를 주제로 ‘날개.파티’기획 전시가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현대미술의 양대 산맥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파티를 다뤘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디자인을 다룬 것도 처음이다. 전시는 고스란히 타이페이 쒜쒜미술관에서 초청을 받아 3월부터 2달간 열린다.

유럽의 여러 학교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프랑스 빠리장식미술학교에서 지난해 초 먼저 편지가 와 협약을 맺고 학생과 교수진을 교류하고 있다. 워낙 위상이 높은 학교라 일종의 보증서 역할을 해 다른 학교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졌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찍 국제적 위상을 얻었다. 국내적 위상은 좀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물론 파티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속적인 문제다.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것, 그리고 이 평판에 걸맞는 속을 채워가면서 지속가능한 상태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적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파티 비롯 정신이 변질되지 않으면서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숙명적 숙제다.
 

날개에서 파생된 협동조합 1호인 '동네부엌 천천히'에서 식사를 하며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안상수 날개.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으로 열린 '날개.파티' 전시 전경. <사진제공=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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