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정치학의 대표적 이분법으로 진보와 보수가 있다. 진보(progressive)는 기존 체제에 대항하면서 변혁을 통해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을, 보수(conservative)는 전통가치를 옹호하면서 기존 체제를 유지・안정시키려는 성향을 뜻한다. 워낙 상대적인 개념이라 자칭, 타칭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고 서로 견제하고 비판하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진보라 말하는 정당의 대부분이 중도에 속하며, 보수라 말하는 정당은 수구에 속한다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가 한목소리로 통일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경제성장과 관련된 지점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정당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더 많이 벌고, 더 풍요로워지며, 더 행복한 삶을 약속한다. 과연 가능한가? 자본주의가 전 세계화된 이후 ‘성장’은 하나의 교리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환경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장해 왔다. 몰락과 쇠퇴와 소멸에 대해서는 모두가 쉬쉬하고 외면해왔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탄생과 성장뿐만 아니라 몰락과 소멸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류의 성장에는 엄청난 대가가 있었다. 다양한 생물종의 멸종과 환경의 파괴는 인류종의 성장으로 인한 것이다. 게다가 인류 역시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기성세대의 탐욕은 청년세대의 절망을 낳았고, 청년세대들은 자연스럽게 비혼과 비출산으로 대응하고 있다. 혼인과 출산조차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면 포기하는 인류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노오력’해도 안 되는 사회에서는 투기적, 도박적 ‘가즈아’가 성행하기 마련이다. 투기적 성장(?)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다. 진보의 미래를 다시 반성하자. 진보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그 ‘앞’은 이제 성장이 아니라 성숙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무한성장할 수는 없지만, 무한성숙은 가능하다. 성숙은 깊어지는 것이다. 무르익는 것이며, 생명으로 단단해지는 것이다. 경제적 욕망 대신 생태적 지혜를 선택하는 것이다. 꽃이 열매를 위하여 꽃잎을 떨구듯이, 나무가 겨울을 위하여 잎을 떨어뜨리듯이, 자신의 쇠퇴와 몰락을 계획하고, 기꺼이 그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高)성장을 포기하고 저(低)성장과 무(無)성장,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을 받아들일 때 성숙의 길이 열린다. 덜 벌고, 덜 쓰고, 덜 살 때 더 나누고, 더 누릴 수 있는 길이 보인다. 플러스 행복이 아니라 마이너스 행복의 길을 모색할 때다.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겠지만, 그 마이너스의 길만이 인류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선거철이다. 임기 4년의 명운을 걸고, 여러 후보들이 나와 여러 공약을 제시하며 분투하고 있다. 4년이라는 짧은 임기 때문에 공약도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주민의 삶은 4년 단위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깜짝 공약과 개발로 지역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내 임기에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지 말자. 모두를 더 잘 살게 해주겠다는 정치적 언표는 거짓이다. 유한한 자원(재정)으로 무한한 욕망을 채울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볼 때 누군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나 불행을 전제하는 것이다.

교육만이 백년지대계가 아니다. 정치 또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후대를 불행하게 만드는 정치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내 편, 내 재산, 내 권력 늘리는 정치인의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지켜보고 있다. 슬기로움은 ‘깜빵생활’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절실히 요구되는 항목이다. 부디 눈 밝은 유권자들이 많이 생겨 성숙한 정치풍토가 정착되는 시대가 오길 기대한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