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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사록(近思錄)<높 빛 시 론>
  • 이권우 도서평론가
  • 승인 2018.04.02 16:55
  • 호수 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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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놓고 젊은이들과 독서토론을 했다. 노벨상의 후광과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한 영화 덕에 큰 부담 없이 읽어왔다.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재미는 해석의 미묘한 차이다. 

일군의 가즈오 작품은 동일한 형식으로 같은 주제를 솜씨껏 변주한다. 반복하는 형식으로는 회고조의 작품이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자신의 삶을 반추하다보니 대체로 회한의 정이 드러난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쟁점이 주인공 스티븐스가 과연 캔턴 양의 사랑을 알았겠느냐 하는 점이었다. 스티븐스의 회고만 강조해서 본다면 그는 결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캔턴 양의 행동이나 두 사람 사이의 정황, 그리고 마지막 말을 참고하면 스티븐스가 그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이 주제로 설왕설래하면서 가즈오의 작가적 역량을 확인했다. 기억과 진실은 늘 길항한다. 회고조의 작품은 기억이 압도적인 양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보니 독자는 그 기억이 진실이라 믿는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바위를 비집고 나온 진실의 싹을 보노라면 판단은 달라진다. 압도적인 것과 인상 깊은 것의 대립 또는 대결에서 등장인물이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야 한다. 무릇 소설은 말을 많이 해 주제의식을 강화하건만, 가즈오는 나지막히, 적게 말해 상황에 대한 이해를 이끈다.

직장인이라 그랬나, 『남아있는 나날』의 또 다른 주제는 쉽게 합의했다. 스티븐스가 회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직하기만 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는 20~30년대 유럽의 정치지형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달링턴 경의 집사였다. 그는 위대한 집사가 되고 싶었다. 기본적인 정의는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차이는 누구를 모시느냐에서 갈라졌는데, 그 점은 세대별로 달랐다. 아버지 세대는 '주인이 작위를 받았느냐, 아니냐, 혹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냐 아니냐'를 중시했다면, 스티븐스 세대는 '소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신사'를 모시고 싶어 했다. 앞 세대는 세상을 사다리로 보았고, 후속 세대는 바퀴로 보았던 셈이다.

그런데 같이 토론한 사람 가운데 다수는 집사라는 직에 충직해서 스티븐스가 놓친 것에 주목했다. 스티븐스는 선공후사의 아이콘이었다. 그래서 사랑을 놓쳤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여기에 상당히 감정이입이 되었더랬다. 직장에서 요구하는 직무 충실성에 발맞추다보니 벌써 탕진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는 반응이다. 왜 안 그러겠는가. 삶에서 더 우선되어야 할 그 무엇을 양보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생활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감은 누구나 들 법하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위대한 집사에 대한 스티븐스 세대의 정의였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 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달링턴 경이 결국 나치 옹호론자로 낙인찍혔고, 그 결과 모든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스티븐스는 끝내 위대한 집사가 되지 못했다. 왜 이런 파국이 일어났을까? 다른 무엇보다 그가 스스로 세상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지 않고, 유력인에게 의존해 어떤 성과를 내려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삶의 현장에서 더 나은 세상을 세우기 위한 노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역사는 그들의 이야기가 모여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그는 대문자 역사에만 방점을 찍었다. 의탁하는 순간, 고삐를 놓친다. 말장난을 하자면 그는 근사한 삶을 살았지 근사(近思)한 삶은 살지 않았던 셈이다.

두 번째는 관계의 문제이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나치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막을 수 없었노라고 항변한다. 그럴 테다. 그의 교양수준은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연애소설을 탐독하는 수준이었고, 경의 책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링턴 경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낱 집사의 수준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있다. 그가 그 집에서 나왔어야 한다. 의리보다 정의를 택했어야 마땅하다. 나는 죄 없다고 손 씻을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얼마나 허무한지 확인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스티븐스 같은 항변이 터져 나온다. 『남아 있는 나날』을 곱씹으며 나 자신을 되돌아 볼 뿐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rainer4u@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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