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이며, 호는 다산,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등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남인가문의 출신으로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의 저작물을 남기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경세가이자 실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오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주역(周易)을 붙잡고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주역의 대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다산은 성균관 유생시절부터 정조의 각별한 관심과 총애를 받았다. 그러다 28세에 대과에 급제해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으나, 정조 사후 집안이 풍비박산 당하는 화를 입어야 했다. 1800년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서학(천주교) 신봉자와 남인을 탄압하는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이때 맏형 약현(若鉉)은 참수되고, 셋째 형 약종(若鍾)이 장살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둘째 형 약전(若銓)과 막내였던 다산 자신은 참수형에서 유배형으로 감형돼 각기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됐다.

다산은 유배 초기 중앙정치 무대에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자신의 뒤틀린 인생을 뒤집어보기 위해 주역에 몰두했다. “오늘 좋은 일도 내일은 나쁜 일이 될 수 있으니…”, 64괘 가운데 한 괘를 뽑았을 때, 그것이 지금 나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 그만큼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주역의 괘상(卦象)이다.

다산은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잡는 것, 입으로 읊조리고, 붓으로 기록하는 것으로부터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주역 아닌 것이 없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주역은 다산에게 유배의 고통과 고독을 승화시키는 도구이자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주역은 어둠(陰)이 있으면 밝음(陽)이 있듯이 만물은 상호 대립하고, 대칭하는 존재들이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밝혀주는 학문이다. 하지만 주역은 불가근불가원의 경서라고 할 만큼 난해한 학문이다. 그 옛날 퇴계 이황 선생은 젊은 시절 주역에 빠져드는 바람에 평생 지병에 시달리며,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정복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주역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어쩌면 주역은 수많은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들어 평생토록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거대한 늪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주역을 고독한 자의 벗이라 하지 않았던가. 다산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으로 더욱 더 침잠(沈潛)해 갔다.

다산이 유배와 함께 주역을 연구한 지 8년차가 되는 1808년 무진년, 한양에서 천 리나 떨어진 땅 끝 강진의 만덕산자락 유배지에서,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닳아 없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전 24권의 『주역사전(周易四笺)』을 완결시켰다. ‘사전’이란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互體), 물상(物象)의 사법(四法)을 말한다. 학계에 의하면 효변은 다산만의 독창적 해석법으로, 왕필(王弼), 정이(程頤), 주자(朱子)와 같은 대가들의 주석(註釋)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해석규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한다. 다산 스스로도 ‘하늘의 도움을 받아 얻은 글(天助之文字)’이라고 자부할 만큼 다산 필생의 역작이다.

다산은 57세 때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집 여유당으로 돌아와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18년을 더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을 향한 자신의 경륜을 펼칠 기회는 반대파의 저지로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1836년 자신의 회혼 날, 부인과 자녀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어쩌면 다산은 자신이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운명을 타고 났음을 주역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