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 개발 때 모아둔 항아리들을 전시관으로 떠나보내며…

밤가시초가 민속전시관 옆에 전시된 항아리들.


[고양신문] 독 항아리를 보면 언제나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장독대가 생각난다. 흰 모시옷에 수건을 쓰시고 부지런히 장독들을 닦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독은 그렇게 조상들의 정성과 건강의 상징이었다.

 

1989년 봄 전국이 민주화운동으로 뜨거울 때 노태우 대통령은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발표한다. 그중에 고양군 일산읍 일대를 일산지구라고 지정하는 도시계획이 발표됐다. 편입되는 마을은 온통 난리가 났다. 수 대를 살아온 터전에서 쫓겨나는 신세와 조상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심정은 오죽했으랴. 마을 주민들은 보초와 시위가 끊이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그 와중에 사망자가 생기고 고양신문이 지역 매체로 탄생해 유일하게 민의를 대변하며 1면에 ‘군청 앞 도로에 상여 진입’ 기사를 싣기도 했다. 참담하고 청천벽력 같은 정책이 주민들을 흥분시켰다. 투쟁은 날로 심해지고, 정부는 꼭 실현해야 되는 주택 정책이었다.

그해 11월 단국대 손보기 교수팀이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를 담은 책자가 고양문화원으로 배달됐다. 내용은 묘지 비석 13기와 성저마을 성터탐사 결과뿐이었다. 반만년 역사와 석기시대유물이 산재한 고양에 단지 인물비석 13기만 지표조사 된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양문화의 전통과 보존을 위한 단체가 고양문화원인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군민들과 결사반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90년대로 접어들고 보상가가 결정되면서 극렬했던 반대투쟁은 식어들어 보상비를 찾아 이주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문화원이 할 일이 무엇인가, 지표조사를 추가해 땅속 토탄층을 재조사해야 된다는 손보기 교수팀의 조사용역보고서를 근거로 추가지표조사를 강력히 요구하고 학계에선 손보기 교수가 강력히 주장, 추가 조사가 진행됐다.

그후 1992년 5월, 5020년 전 가와지 볍씨와 빗살무늬 토기 등의 출토로 학계는 술렁거렸다. 당대 최고의 고고학자 허문희 교수 등도 참여해 신도시개발지구 중 최고의 문화유산을 발굴했다.

한편 삶의 터전으로 밤가시초가집의 문화재 지정을 건의해 확정했고, 지하철 3호선 구간 발표에 원당경유가 제외되자 원당역 지정을 강력히 건의한 결과 720억원 추가예산으로 원당역 건설이 확정됐다.

1991년, 황량한 벌판에 중장비 소리만 요란하고 황토먼지 속 부서지는 주택이 흉물스러울 때에도 장독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항아리들. 작지만 잔디 위에 우뚝 솟은 비석들. 이곳이 수천 년을 살아온 삶터임을 생각할 때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고양문화원 정동일(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선생과 산재한 장독들을 우리집 원당동 밭에 옮기고 인물 비석들은 정동일 연구원의 모교인 한신대학교로, 농가공예품들은 한성대 민속문예연구소(원장 윤경호)로 이전하는 작업을 땡볕 여름 내내 수고를 마다 않고 수행했다. 60여 개의 독을 운반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중 몇 개는 1992년 홍수에 파손되고 40여 개를 송강문학관 개관 시 이전하여 보관하던 중 이제는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정동일 선생과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고양시청 수장고 보관과 밤가시초가에 보존, 전시하자는 제안에 너무나 기뻐서 동의하고 즉각 실행했다.

이은만 문봉서원장

떠나는 운반차에 실린 독을 보며 울컥하는 마음은 왜일까. 많은 고물장수들이 탐내고 매매를 졸라도 이 물건만큼은 현금으로 안 되는 우리 조상들의 손때 묻은 물건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훼손 우려가 있어 아내는 칡넝쿨을 덮개로 에워쌌다. 내 어머니가 쓰시던 독 2개도 아내가 함께 보냈다.

전시되는 항아리들은 누구나의 것이고 부모님의 손때 묻은 생활용기다. 모두가 일산 밤가시초가집 인근의 주민들의 것이다. 고향의 멋이 보일 것이다. 어머니 , 할머니, 누님들의 손때가 오늘 우리들의 깊은 뿌리를 찾게 할 것이다. 5020년 고양 가와지볍씨 출토 고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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