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 빛 시 론>

정수남 소설가. 일산문학학교 대표

[고양신문] 지난 4월 1일은 부활절이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다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의 사전적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계절로 볼 때 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겨울 동안 죽은 줄 알았던 식물이 소생하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금년 봄엔 소생한 게 비단 식물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던 남북관계 역시 매우 빠르게 소생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움트기 시작한 이 새싹은 이제 우리의 가시권 안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오는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과 또 5월 열릴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북의 김 위원장이 지난 3월 25일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시진핑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능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북한 최고지도자가 이처럼 갑자기 돌출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또 그 우려가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주변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맞물려서 비핵화 해법이 설왕설래하는 것 역시 묵과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을 이루어야 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방법에는 변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최우선 의제는 남과 북의 평화공존을 위한 관계개선이어야 한다. 비핵화 역시 그것을 전제로 한 것일 터이지만, 그것은 남북의 관계가 먼저 개선되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고, 체제를 인정하며 신뢰를 쌓는다면 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벼르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지금의 체제가 아니라 그 전 세대에 이루어졌던 일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윗대가 그랬으니까 그 아랫대도 그럴 것이란 예측성 발언은 불신에서 비롯된 비논리적 주장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듯 불신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면 그 회담이란 애당초 목표의 꼭짓점을 잃은 것 아니겠는가.

식물이 발아하여 싹이 나고, 또 그 싹이 자라 큰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폭풍우와 같은 시련 또한 당당히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왜바람과 또 낡은 이념의 틀에 갇혀 있는 보수 세력이 끊임없이 내뿜는 돌개바람 따위에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10년 만에 부활한 금년의 봄을 또 잃어버릴 게 분명하다.

돌아보면 지난 10년은 정말 남북관계의 혹한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진보적 성향의 학자와 지식인, 통일전문가들의 충고와 주장을 귓등으로 흘리며 대화의 창을 닫아버렸다. 금강산 관광도 중단시켰고, 개성공단도 폐쇄시켰다. 단절된 남과 북은 ‘둘’로 쪼개진 채 꽁꽁 얼어붙었으며,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염원 또한 점점 차가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사이 북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여 몇 차례 실험을 감행하였으며, 세계를 위협하고 경악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것 또한 자신들의 주장처럼 위협하는 강대국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자위적 수단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동토에서도 통일의 씨앗은 죽지 않고 올곧게 살아 있었다. 물론 10년 동안 그대로 자랐다면 지금쯤 아주 큰 나무가 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후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아픈 세월을 통해 다시 부활한 이 새싹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더더욱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이란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새싹이 자라나 꽃 피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정성껏 보듬는 것은 물론, 사방에서 불어오는 모진 비바람을 온몸으로 차단해야 할 일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잃었던 10년의 세월을 다시 되찾았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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