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인의 정신의학칼럼>

 

[고양신문] 세상에서 넘기 힘든 문턱 중 하나가 정신과 외래 문턱이 아닐까. 문턱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문 앞에서 서성이며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우리가 OECD 자살률 1위 나라라는데, 죽는 것만큼 힘든 일이 정신과를 내원하는 일인가보다. 몸이 아플 때 병원 가는 것은 당연한데, 마음이 아파 병원에 가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들게 느껴질까? 근래 들어 공황장애나 불안장애 환자의 경우 정신과 외래에 오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마음의 고통으로 힘든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아직 정신과의 문턱은 높다.

우리 문화에는 정신과를 찾는 것을 마치 마음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처럼 여기는 부분이 있다. 치아에 문제가 생기면 치과에 가야 하고, 위장이 나약하면 소화기내과에 가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나약해져 정신과에 내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어야 한다. 외국처럼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듯이 마음의 고통에 대해 정신과의원에 내원하면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신과의 문턱은 아직도 높고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원을 망설이며 힘들어한다. ‘마음의 대상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문화가 문제의 본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픈 마음을 아픈 마음으로 보지 않고 나 자체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아픔이 나 자신의 본질 자체라면 치료하는 것이 이상하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울증이 누군가의 본질은 아니다. 오히려 우울증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때 좀 더 나 자신다워졌다는 고백을 임상 현장에서 많이 듣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울증은 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족쇄에 가까운 것이지 나 자신은 아니다. 더군다나 우울증을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치통에 진통제를 먹듯이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우울감에 그저 적절한 치료를 하면 되는 것이다. 물에 빠져 익사하려는 사람은 빨리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왜 물에 빠졌는지, 왜 못 나오는지를 자꾸 따져서는 안된다.

외래 환자 중 우울증은 참고 이겨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분을 자주 만난다. 그러다보니 참고 이겨내지 못해 정신과까지 내원한 자신에 대한 비하와 우울감은 더 심해진다. 하지만 참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우울한 기분이지 우울증이 아니다. 간암이나 폐렴을 의지로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뇌의 호르몬 변화가 진행된 우울증은 의지만으로 좋아지지 않는다.

우울한 기분은 친구와의 수다나 낮잠, 휴가 다녀오기 등의 노력으로도 극복되고는 한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해 우울한 기분일 때와 같은 전략(이를테면 친구 만나기, 쇼핑하기, 여행하기 등등)을 쓰면, 결국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무력감과 절망감을 더욱 악화시킨다. 기존의 방법이 안 통하니 더욱 무기력해지고 절망하게 되는데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역설적으로 어느 단계부터는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하고 무기력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일단 이러한 악순환의 코스로 가게 되면 스스로의 힘으로 우울증을 극복하는 일은 요원해진다. 마치 늪지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이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우울증 환자에게 힘내라는 말이 때로 독인 이유이기도 하다.

우울증처럼 괴로운 질병도 없기 때문에 겉보기와는 달리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우울증에서 뛰쳐나오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한 경우가 많다. 이미 수많은 실패로 우울증은 평생 극복될 수 없다는 자기 결론을 내린 상태인데 자꾸 좀 더 힘내보라,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따뜻한 말이 때로는 가슴을 꽂히는 비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우울감이 있다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정신과에 내원해 적절히 평가받고 치료받아야 한다. 진료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고, 약물 치료를 할지 안할지는 진료 이후에 고민해볼 문제다.

 

설경인 정신과의사(상록의료재단 화정병원)

더군다나 시대가 변했다. 개인 정보는 철저히 관리되며, 공무원 임용이든, 보험 가입이든 여타의 영역에서 정신과 진료로 인한 불이익은 없다. 마음의 괴로움이 크다면 정신과의 문턱을 넘어보자. 그 한번의 용기가 삶을 바꿀 수도 있다. 하루라도 빨리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지길 기원할 뿐이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