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유월로 접어들면서 작물들이 탄력을 받아 엄청 빠르게 자란다.

작년 가을에 심었던 마늘은 일제히 마늘쫑을 올리고, 양파는 하나 둘씩 대가 쓰러지기 시작한다. 입하에 심었던 열매채소들도 부쩍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단다. 감자도 싹을 내밀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무릎 높이까지 자랐고, 땅콩 싹도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동안은 텃밭에서 잎채소만 수확해서 밥상에 올렸는데 이제는 일주일에서 열흘만 기다리면 토마토를 비롯해서 고추, 파프리카, 가지, 오이, 애호박, 참외까지 그야말로 성찬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하지가 되면 감자와 양파와 마늘을 수확해서 다양한 요리를 맛보게 된다.

우리 농장에서는 하지가 되면 감자와 양파를 듬뿍 넣고 짜장라면을 새참으로 끓여먹는데 이게 아주 별미로, 먹어본 이들은 어지간한 중국집 짜장면보다 맛있다면서 엄지를 쑤욱 치켜세운다. 농장에서 모닥불을 피워 구워먹는 감자도 막걸리 안주로 그만이다.

초보농부들에게 유월의 텃밭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열매채소들이 매주 화수분처럼 주렁주렁 달리기 때문이다. 유월 하순부터는 열매채소를 남김없이 수확해도 일주일만 지나면 더 많은 열매가 달린다. 초보농부들은 농장에 올 때마다 열 평짜리 보물창고 앞에서 입이 귀밑에 걸린다. 어떤 이들은 밤에 대리운전을 하고 와서 텃밭을 둘러보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나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곤 감탄에 감탄을 연발한다.

나처럼 많은 양의 농사를 짓는 사람은 예외이지만 열 평에서 스무 평 내외의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은 워낙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에 무슨 열매가 어디에 몇 개 달렸는지 짜르르 꿰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가 서리를 해가면 금방 알아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다 알지만 서리를 당하면 여간 속상한 게 아니다. 누구에게 돈을 뜯긴 것 못지않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건 단순히 열매채소를 빼앗긴 게 아니라 작물이 자라는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그간의 노고와 작물에게 쏟아부운 애정을 도둑질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서리를 한 사람들은 그 밭의 주인이 까맣게 모를 거라는 착각들을 한다. 그리고 서리가 범죄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서리를 하다가 들켜서 뭐라고 하면 되레 인심 야박하다고 짜증을 부리기까지 한다.

농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화가 나기보다는 차라리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노동을 도둑질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얼마나 가여운가.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행히 우리 농장은 공동체문화가 자리 잡아서 작물에 손 타는 일은 없다. 그러나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그동안 우리는 남의 노동을 빼앗는 사회를 너무 당연시해왔단 생각이 든다.

하늘 아래 모든 노동은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저런 틀을 만들어서 노동을 차별한다. 그리곤 차별 받는 사람들을 마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양 무시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노동이 평등해졌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이런 바람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조금씩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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