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상만 인권운동가

고상만 인권운동가

[고양신문] 내가 장준하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때는 1993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1990년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이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감옥까지 다녀와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던 시기였다. 우연히 시사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게 되었다.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과거 독재권력 하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첫 번째 대상자가 바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이었다.

장준하. 그는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1944년 1월 일본군으로 징병되었다. 일제로부터 감시받던 아버지 장석인의 안전과 훗날 부인이 되는 제자 김희숙이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도록 하고자 스스로 선택한 징병이었다. 그래서 징병되어 끌려가기 전날이었다. 장준하는 며칠 전 결혼한 신부 김희숙에게 놀라운 말을 남긴다. “입대하면 당신에게 자주 편지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편지에서 성경을 인용하는 내용이 있으면 그때는 내가 일본 군영을 탈영한 것으로 알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남편 장준하가 보내온 편지에 성경 구절이 있었다. 신부 김희숙은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랬다. 장준하는 이미 일본 군대를 탈영하여 무려 6천리 길을 걸어 충칭의 임시정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광복군으로 입대하는 길이었다.

나는 이런 내용의 방송을 보며 매우 감동했고 또한 의아했다. 광복군으로, 해방 후에는 백범 김구의 비서로, 그리고 ‘사상계’라는 당대 최고 잡지의 발행인으로, 이어 1967년 제7대 국회의원과 재야인사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장준하를, 고백하건대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그것이 부끄러웠다. 이 방송을 보기 전까지 나는 이런 장준하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장준하라는 인물에 대해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듣거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그가 박정희 독재권력과 맞서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했기 때문이다.

말은 추락사로 알려져 있지만 세간 사람들은 ‘박정희 권력에 맞서다 타살 된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런 장준하였기에 박정희와 이후 전두환, 노태우 독재권력 하에서 내내 금기 언어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의 방송을 보던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당시 진행자인 문성근씨의 마지막 멘트였다. 문성근 진행자는 장준하의 애국적인 일생과 함께 말미에 의문사 규명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단위에서 이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며 강조했다.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반드시’ 그런 노력을 해 줬으면 했다.

그런데 놀라웠다. 그 방송을 본 1993년에서 10년이 흐른 2003년 어느 날, 나는 뜻밖의 우연과 마주했다. 다름 아닌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밝히는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내가 발탁된 것이다. 나는 놀라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사건의 진실을 누구보다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러 성과물이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장준하 선생은 추락사가 아니라는 합리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특히 2012년 8월 외부 가격에 의해 함몰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이장 과정에서 드러나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은 더욱 분명해 졌다.

하지만 올해, 그러니까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이 백년 생일상을 맞이하는 2018년 지금까지도 그의 의문사는 완전한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장준하 선생의 넋을 추모하고자 많은 이들이 백년 생일을 맞은 올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8월 14일 오후 4시에는 인천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독립의 길, 평화의 길’이라는 주제로 문화 공연을 준비하고 있으며 18일에는 포천 약사봉에서 43주기 추모제를 기획하고 있다. 그리고 8월 26일(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장준하 100년 어울림 한마당’을 개최하여 장준하 100년 생일떡을 나눠주는 한편 풍성한 문화 공연도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장준하 선생이 후손을 위해 살아온 일생을 기억하려 한다. 광복군으로, 그리고 민주투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고자 수없이 몸부림친 장준하. 그를 기억하는 것은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의무가 아닐까. 장준하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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