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자랑스러운 고양인 독립운동가 동암 장효근 선생

제국신문 순 한글신문 발간 
민족대표 33인 권유받았으나 
자질 부족하다 거절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책임 맡아 

 

씨족협회 3·1운동 100주년 앞두고 선정
[고양신문] 광복 73주년을 맞아 전국 각 지자체별로 독립 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고양시씨족협의회(회장 이영찬)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고양출신 대표 독립운동가인 동암 장효근 선생<사진>을 올해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매년 고양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을 선정해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자랑스러운 고양인’은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그동안 고려 말 명장 최영 장군, 고양을 대표하는 의병장 석탄 이신의, 고양팔현으로 배향된 추강 남효온 등을 선정해왔으며 독립운동가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농촌운동을 펼친 양곡 이가순 선생이 이름을 올린 바 있다.     

2018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된 동암 장효근 선생(1867~1946)은 일제강점기 전후로 언론·계몽활동 및 비밀결사활동 등을 펼쳤으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특히 장효근 선생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남겼던 ‘동암일기’는 올해 초 문화재청에서 ‘항일독립문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동암 선생에 대해 연구해온 최경순 공양왕고릉제 제전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그의 생애와 행적을 정리해봤다.

제국신문 발행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참여
덕수 장씨의 후손인 동암 장효근 선생은 독립운동 당시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147번지에 살고 있었으며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고 활동해왔다. 보수적인 유학자 출신이었던 그가 개화지식인으로 변모하게 된 계기는 32세(1898년) 당시 ‘제국신문’을 발간하면서부터다. 당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이종일 등과 함께 신문발간에 참여하면서 동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애국과 민족계몽에도 눈을 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효근 선생은 당시 신문이 가지는 항일운동의 성격과 민족계몽의 역할을 매우 중시했다. ‘제국신문’을 혁신적인 순 한글신문으로 발간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말부터 일제 초기 민족운동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과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그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장효근이 또 찾아와 말하기를 “신문을 발행하면 부녀자층의 독자를 골라서 여성해방을 주도하자”고 했다.’ (‘묵암비망록’ 1898. 5. 16)

‘근래 새로 설시된 신문들은 - 중략 - 널리 전파하여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려는 바 - 중략 - 국문으로 박아 폭을 적게 만들고 값을 간략히 마련하여 그저 주나 다름이 없이 하여 상하 남녀 귀천 무론하고 저마다 보게 하니 - 하략 -’ (‘제국신문’ 1898. 9. 7자 사설)  

‘제국신문’은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무장투쟁보다는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개량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1907년 친일파 정운복이 사장이 되면서 친일적 신문으로 바뀌자 장효근 선생은 이 신문을 완전히 떠났다. 

장효근 선생은 언론활동뿐만 아니라 을사늑약이 임박한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생겨난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 각종 계몽단체에도 참여하며 평소 꿈꿔오던 자주자강의 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해왔다. 

회장 윤치호와 함께 대한자강회 간사원으로 활동했으며 해체 이후에는 대한협회를 결성했고 기관지인 ‘대한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당시 대한협회는 무장투쟁보다는 점진적인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운동을 펼쳤다. 

이종일 등과 비밀결사체 조직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부터 장효근 선생은 민중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나서기로 생각을 바꿨다. 이때부터 이종일을 도와 천도교 비밀결사조직인 대한제국민력회에 참여해 이종일의 최측근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이종일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에게 독립을 위한 민중시위운동을 수차례 제안했지만 신중론 때문에 천도교 전체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다만 1911년 2월 장효근 선생은 유영석, 이종면 등 대한제국민력회의 핵심인물들과 함께 대대적인 민중시위운동을 추진해 나갈 것을 협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국제정세에 대응한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장효근, 이종일, 김홍규, 신영구 등은 새로운 비밀결사인 천도구국단을 조직했다. 당시 천도구국단은 시국선언문을 배포하고 윤기호, 양기탁 등 국내 유력인사와 접촉하는 등 민중봉기를 준비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당시 장효근 선생은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으로 1916년 4월 당시 일본식 장총 10여 정과 실탄 200발, 군자금 600원을 모았을 정도였으며 이러한 강력한 항일투쟁의식은 이종일을 비롯한 천도구국단 동료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제2 3·1운동 실패 후 고양으로 낙향
1917년 러시아혁명과 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원칙’ 등을 계기로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양되던 가운데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 급서를 계기로 천도교의 움직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2월 24일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총 33명의 민족대표가 확정됐으며 당시 장효근 선생도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할 것을 손병희로부터 권유받았지만 자질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를 책임졌으며 3·1운동 이후 이 문제로 투옥된 뒤 곧바로 석방됐다. 

이후 장효근 선생은 천도교 경성대교구장을 맡으며 부인강습소를 설치하는 등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그러던 중 1921년 태평양회의를 이용해 제2의 3·1독립만세를 계획하고 자주독립선언문의 인쇄에 들어갔으나 2월 27일 일제경찰의 급습으로 압수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제2의 3·1독립만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듬해 1월 장효근 선생은 천도교 직책을 사임했으며 1924년 고향인 고양군 행주내리로 낙향했다. 낙향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가 있었지만 그는 동학사상을 가르치는 서당을 열고 지도강습소 기성회 회장을 맡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25년에는 지주들을 설득해 소작농민들의 소작료를 3할 이내로 인하하기도 했으며 특히 1931년에는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장군의 사당인 행주기공사 수리보수사업에 앞장서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낙향 이후 노년에도 독립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했던 장효근 선생. 마침내 독립의 꿈은 이뤘지만 민족국가 수립은 보지 못한 채 1946년 4월 30일 행주내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고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동암 장효근 선생의 생가가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생가 보존 등 자랑스러운 고양의 역사 인물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기념사업이 필요하다.

생가 빈집 방치, 생가보존·기념사업 필요
정동일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은 “동암 장효근 선생은 ‘동암일기’라는 생전 30년간의 기록을 남긴 인물이자 옛 생가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라며 “특히 행주기공사 보수사업에 앞장섰던 향토독립운동가로서 고양시에 가지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정 전문위원은 특히 “고양시 출신의 다른 독립 운동가들은 다른 지역에서 생을 마무리했지만 장효근 선생은 이곳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생가의 가치도 높다고 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최경순 공양왕고릉제 제전위원장은 동암 장효근 선생의 생가보전과 함께 기념사업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최 위원장은 “현재 장효근 선생이 거주하던 생가와 토지가 다른 이의 소유여서 지금 빈집인 채로 방치된 상황”이라며 “고양시 차원에서 이를 매입해 사적지화 하고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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