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여성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오늘 여권통문을 다시 펼치다’

1898년 작성, 여성인권의 첫 걸음
"여성이여, 방에 머물지 말고 배우고 진출하자"

 

'여성통문' 12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여성사전시관 입구.


[고양신문]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에 살던 김소사와 이소사라는 여성이 ‘여학교설시통문’이라는 글을 내놓는다. 개명된 세상에서 여성들도 더이상 방안에 머물지 말고, 교육을 받고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 여학교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후대 학자들에 의해 ‘여권통문’이라 이름 붙여진 이 선언문은 근대적 인권 의식을 갖춘 새로운 여성의 출현을 알린 출발점으로 평가받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그 존재와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권통문 발표 120주년을 맞아 이 땅의 여성운동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덕양구청 건너편 정부지방고양합동청사 건물에 자리한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오늘 여권통문을 다시 펼치다’라는 타이틀로 열리고 있다.
 

▲ 교육·직업·참정권 주장한 글, 황성신문, 독립신문에 발표

‘글로벌 시각에서 보는 한국여성사 격동의 120년’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전시는 이 땅의 여성사와 역사와 세계 여성운동의 긴 흐름을 함께 아우른다.

1898년 '여권통문'이 게재된 한성순보 지면.

초입에서는 이번 전시의 핵심 콘텐츠인 ‘여권통문’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양가집 부인으로 추정하는 두 여성은 함께 작성한 여권통문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한다. 전시장에는 당시 황성신문 지면과 오늘날 새롭게 필사된 서예작품을 나란히 전시했는데,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여성이 더 이상 남성에 기대어 방 안에서 지내지 말고, 교육을 받고 세상으로 진출하기 위해 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근대적 인권의 핵심인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 개념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다.

여권통문은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않았다. 찬양회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하기도 하고, 순수 민간자본을 바탕으로 건립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순성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전시를 보며 초기 여권운동가들의 놀라운 역사를 그동안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지도 배우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던 1920~30년대 잡지들.

 

▲ 한국여성사 격동의 120년, 세계사적 여성운동사 함께 전시

1920년대 동덕여학교 학생들이 입었던 교복.

이어지는 전시공간은 크게 국내와 해외 두 구역으로 나뉜다. 먼저 만나는 전시물은 여권통문 이후 120년 동안 우리 땅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교육과 직업, 참정권을 중심으로 집약해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근대 교육이 시작된 개화기를 거쳐 일제의 교육을 받아야 했던 강점기, 해방 이후 확장된 교육의 역사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1920년대 동덕여자고등학교의 자그마한 치마저고리 교복 등 인상적인 유물들이 눈길을 끈다.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잡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의견과 생각을 표현했던 과정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살필 수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직업으로 진출했던 여성들의 역사도 요약적으로 정리됐다. 특히 외판원, 안내양, 공장노동자 등이 주류였던 1970년대 여성들의 모습에서 산업화와 도시화의 명암이 함께 드러난다.
 

1945년 창당된 우리나 최초의 여성정당 '대한여자국민당'의 규정집.

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스스로의 정당한 권리를 확장하려는 여성들의 열망은 꾸준히 표출됐다. 최초의 여성 정당을 표방한 1945년 대한여자국민당 강령집,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부르짖었던 1980년대 브로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80년대 후반 여성들,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기록 등은 여성운동의 장구한 흐름을 증언하는 소중한 전시물들이다.

이땅의 여성운동사를 일별했다면 이제 세계 여성운동의 굵은 마디들을 살필 차례다. 이곳에선 1791년 프랑스에서 공표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비롯해 18세기 후반 영국의 참정권운동, 여성신문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쳤던 독일, 미국 등 서구 주요국의 여성운동 역사가 중심인물과 사건을 함께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시돼 있다. 서구 뿐 아니라 일본, 중국, 이집트, 베트남 등 세계 각국 여성들의 주요 사건도 정리해 여권운동이 특정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전개된 세계사적 발자취였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여권통문’으로 상징되는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사도 세계 여성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의도도 담았다.

1층 기획전시장과 2층 상설전시장을 잇는 계단은 기획전의 의미를 갈무리하는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아티스트들이 만든 미술작품을 전시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점과 전망을 되돌아보도록 꾸몄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운동의 주요 인물들을 살필 수 있는 전시공간.

 

▲ 추모와 평화 공간, 새로운 상설전시관 운영

국립여성사박물관은 이번 기획전을 전후해 2층 상설전시장도 새로운 모습으로 리뉴얼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여성사적 유물들을 미디어아트 작품과 함께 전시한 기존의 시대존과 테마존과 함께 추모존과 평화존을 새롭게 보탰다.

추모존은 일본군 위안부의 슬프고 가슴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기리는 전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진은수 작가의 ‘안식의 집’ 미니어처 조형작품이다. 이 작품은 올해 8월 14일 진행된 첫 번째 ‘기림의 날’을 기해 천안 국립망향의 동산에 만들어진 안식의 집을 100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이다. 기림의 날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한 날을 기억하기 위해 여성가족부에 의해 제정된 기념일이다. 이와 함께 청년화가 정서한의 회화작품 ‘꽃잎에 가려진 얼굴 없는 슬픔’, 김창겸 작가의 영상작품 ‘물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2015 DMZ 평화걷기 행사 때 제작된 조각보. 남한과 북한, 해외 여성들이 함께 만들었다.

평화존은 국립여성사전시관이 지향하는 미래의 비전을 담은 공간이다. 이곳에선 전시관이 자리한 고양·파주 지역 여성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2015 DMZ평화걷기운동(위민 크로스)의 흔적을 전시했다. 남과 북, 그리고 세계의 여성이 힘을 모아 이 땅을 짓누르는 분단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한 열망을 표출했던 기억을 소중하게 전하기 위해 ‘평화걷기 조각보’를 비롯한 기념물을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준비한 국립여성사전시관 기계형 관장은 “고양과 파주는 어느 지역보다 평화와 생명을 향한 염원이 뜨거운 곳”이라며 “여권운동 120년의 역사, 그리고 여성이 열어갈 미래의 소망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전시에 보다 많은 이웃들이 찾아와 주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립여성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오늘 여권통문을 다시 펼치다’


주소 : 고양시 덕양구 화중로 104번길 50
관람료 : 무료
문의 : 031-819-2299
 

김창겸 작가의 영상작품 '물그림자'. 영상이 비치는 우묵한 화면이 정한수를 담는 그릇을 닮았다.
19세기 미국에서 제작된 퀼트작품. 사회참여가 불가능했던 여성들의 열망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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