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언필칭 4차 산업혁명의 시대란다. 1‧2차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신하더니, 3‧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정신노동을 대신한단다. 에헤라디야~. 70~80년대에 노동운동계에서 그렇게 외치던 ‘노동해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왔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안 좋다. 노동해방이 인간해방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노동 대체의 성과물이 인간에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개발자와 소유주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실직과 실업 상태의 영구화를 낳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계가 만들어놓은 상품은 시장에 널려있지만, 그 상품을 구매할 구매자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 구매력 상실의 보편화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아이디어가 보편적 기본소득이다. 생산하지 않더라도 소비는 해야 경제가 돌아갈 터이니, 최소한의 소비를 보장하자는 이론이다. 이 아이디어는 아직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몇몇 자치단체에서 실험적으로 실천해보고 있다. 한편 정부는 대량 실직상태와 청년실업을 위한 대책으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엄청난 기금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참으로 미미하다. 당연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단순한 일자리를 마련하더라도 그 일자리를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경제구조에서는 늘어나는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별로 없다.

생각해보면,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직장을 잃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몸뚱아리를 움직여도 소득이 없는 노동자, 현대사회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넘쳐난다. 평생을 가사와 육아노동에 힘썼지만 소득이 없었던 주부노동자들이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원하지도 않는 학습노동을 해왔지만 소득이 없었던 청소년‧청년노동자들이나, 사회봉사활동을 무보수로 해왔던 시민노동자들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치적 열망을 위해 분투했던 사회단체, 정당노동자들 역시 소득이 없었다. 이처럼 대다수의 소득 없는 자들의 노동을 밑거름으로 해서, 직장을 다니며 소득을 얻었던 자들이 행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고,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고소득을 누렸던 소수의 자들이 갑질을 해왔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들은 바로 학습노동자(학생)들이었다. 안정적인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위해 유아, 청소년, 청년기의 20년을 무급으로 학습노동을 해왔던, 아니 가계소득의 엄청난 부분을 투여하며 학습노동을 해왔던 학생들에게 이제 안정적 노동시장의 진입장벽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학교와 학원을 통해 배웠던 것들은 모두 시험과 입시에만 소용되었을 뿐,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무능력자를 양상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위해 최종적으로 들어간 백화점(명문대학), 대형마트(인서울대학), 소형마트(지방‧전문대학)에 취직(합격)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이들의 일자리가 보장되지는 않았다. 교육시스템의 총체적인 실패였다. 내신과 수능은 미래를 향한 관문이 아니라, 과거에 폐기했어야할 시대착오적 제도에 불과하다. 자,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내신과 입시를 위한 교육시스템을 폐기하고,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고, 개인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작업과 공공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마련해야 한다. 그를 위해 강제적으로 실행했던 학습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계에서 노동해방이 목표였다면, 교육계에서는 강제학습해방이 목표다. 시대착오적인 강제학습노동에 시달렸던 학습노동자(학생)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미래 없는 수동적 삶이고, 얻을 것은 능동적 주인공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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