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도학 교수 ‘…고양의 속 깊은 역사’ 발표

고양가와지 인문학 강좌에서 처음 발표
삼국시대 고양땅 위상 조명할 새 견해 

"백제 근초고왕 천도한 한산은 북한산성,
고구려 별도 ‘남평양성’도 북한산 일대였다"

 

고양의 주산인 북한산 일대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와 고구려의 별도였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이재용>


[고양신문] 권위 있는 역사학자로부터 고양땅이 백제의 국도(國都)이자, 고구려의 별도(別都, 또 하나의 수도)였다는 파격적 학설이 제기돼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펼친 이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다. 고대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활발한 언론 활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이도학 교수는 지난 8월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이 주최한 가와지인문학 강연에서 이 같은 내용을 처음 발표했다.

이 교수의 발표는 가와지볍씨박물관장 이융조 교수(충북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참가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다. 이에 이도학 교수는 당시의 발표 내용을 토대로 학술적 자료를 보완한 ‘백제의 국도(國都), 고구려의 별도(別都), 고양의 속 깊은 역사’라는 글을 작성해 고양신문에 보내왔다.

이 교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해 여러 역사 문헌을 근거로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천도한 한산은 지금의 북한산성 일원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어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낸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또 하나의 수도인 ‘남평양성’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삼국시대 고양땅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발표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이는 한성 백제의 수도를 한강 이남으로 한정하고, 남평양성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던 기존의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견해로 추후 역사학계에 다양한 논의를 촉발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고양시 입장에서는 베일에 가려진 고양땅의 고대사를 보다 정교하게 조명하고, 역사의 깊이를 새롭게 기술할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도학 교수가 보낸 글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지금의 고양땅, 고려 때는 양주(楊州)에 속해

이 교수가 이 글에서 주목한 지역은 바로 고양의 주산 북한산 일대다. 북한산은 서울, 양주시와 경계를 맞대고 있지만, 주요 봉우리와 길이 12.7km, 내부면적 6.2km에 이르는 북한산성 전역이 고양시에 속해 있다. 따라서 옛 문헌에 나오는 북한산 일대의 역사는 오늘날 고양땅에서 전개된 역사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과거 지명이 지금과 달라 연원에 오류가 빚어지기도 한다는 것. 이 교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려 현종 때 고양땅이 고려 때 양주(楊州)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짚은 후 ‘양주는 본래 고구려 북한산군이다. 혹은 남평양성(南平壤城)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에 주목해 양주=북한산군=남평양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설명한다.

그럼 삼국사기가 기술하고 있는 고구려의 남평양성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이 교수는 먼저 조선 전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고양현과 행주현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이전에는 응당 고양땅이 양주의 관하에 속했다는 사실을 짚는다.

근초고왕이 천도한 백제 수도는 ‘북한산성’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성까지 진격해 고구려 고국원왕을 살해한 후 371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긴다. 이 역사적 사건을 『삼국유사』는 더 구체적으로 ‘북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과 『세종실록지리지』의 ‘양주도호부는 본래 고구려 남평양성인데 혹은 북한산이라고도 한다. 백제 근초고왕이 이곳을 취하여 25년 남한산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과 대조해 보면, 근초고왕이 천도한 ‘한산’은 한강 이북의 북한산성,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북한산성 내에 위치한 중흥동고성(重興洞古城)이 분명하다는 것이 이도학 교수의 견해다.

이 교수는 백제가 고구려의 보복이 두려워 수도를 옮겼고, 그 위치는 한강 이남이라는 기존의 학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당시 근초고왕은 고구려 수도에서 적국의 왕까지 전사시킬 정도로 대승을 거둬 기세등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남진책을 펼치던 고구려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한강이북의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백제가 북한산 수도를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재천도한 것은 근구수왕 사후 전세가 다시 고구려에 밀린 이후라고 설명한다.

고구려 별도 남평양성 역시 북한산성

이도학 교수는 이어 고구려가 지금의 고양땅을 장악한 시점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396년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58성과 700촌을 장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의 인천을 일컫는 미추성(彌鄒城)도 이때 차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제는 내륙수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한반도 중심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 한강유역 일대를 일거에 상실하게 된다.

고구려는 지금의 충주까지 장악한 후 국원성(國原城)이라는 행정지명을 부여한다. 이는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이 시점을 396년 이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고구려는 475년 백제 국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반도 중부 이남으로 내려온다. 이때 국도 평양성에서 이름을 따 와 북한산성에 ‘남평양성’이라는 별도(別都)를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강유역 봉수 체계의 출발점 고봉산

마지막으로 이도학 교수는 『삼국사기』를 통해 고구려가 현재 고양땅 관내에 “달을성현(達乙省縣)과 개백현(皆伯縣)이라는 2개 현을 설치했다”는 것과 “한씨미녀가 높은 산마루에 봉화를 피우고 고구려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뒤에 ‘고봉’이라 하였다”는 기록을 살피며 달을성, 고봉과 같은 지명이 삼국시대까지 소급되는 봉수 체계와 관련한 지명임을 밝힌다.

이어 충주의 백제 때 지명이 미을성(未乙省)이라는 점을 주목하며 고양땅 달을이 봉화의 출발점인 고봉(高烽), 충주땅 미을이 봉화의 도착점인 저봉(底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한강 하구에 소재한 고양땅 ‘남평양성’과 남한강 상류에 소재한 또 하나의 별도인 충주 ‘국원성’이 한강유역 봉수체계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짝으로 연결된다는 견해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도학 교수의 발표에 대해 이융조 교수는 “북한산 일원이 백제의 수도였고, 고구려에서는 또 하나의 평양성으로 부를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 낸 놀라운 견해”라며 “고대사에서 지금까지 덜 알려진 고양땅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할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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