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앞두고 찾은 일석 선생의 묘소

국어학 초석 놓은 대학자이자
일제에 항거 옥고 치른 독립지사

1989년 견달산 기슭 선산에 묻혀
역사적 가치 깊지만 아직 미조명

 

고양시 문봉동 견달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일석 이희승 선생의 묘소.


[고양신문] 고양시 일산서구 문봉동 견달산 기슭. 앞쪽으로는 승마장으로, 뒤편으로는 군부대 야전훈련교장으로 막혀 있어 접근이 여의치 않은 언덕을 풀숲을 헤치고 찾아가니 몇 기의 무덤이 나타난다.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자리하고 있는 묘소 중 한 곳의 묘비에 적힌 이름이 눈길을 끈다. 바로 국어국문학자 이희승 박사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수필 ‘딸깍발이’로 유명한 일석 이희승 박사는 우리나라 국어학의 초석을 놓은 대 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제시대에 주시경 선생과 함께 조선어학회를 이끌며 우리말을 지켜낸 스승이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항거한 올곧은 독립지사였던 그는 1942년 일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돼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에는 학계와 문단에서 폭넓은 족적을 남기고 1989년 93세를 일기로 영면한 후 고양땅에 잠들었다.

한글날을 앞두고 일석의 묘를 찾았다. 이희승 선생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이는 김득환 서삼릉태실연구소장이다. 김 소장은 “대 학자가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는데, 주변에 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어 늘 안타까웠다”며 길안내를 자처했다.

원래 산기슭 아래쪽으로 묘소의 진입로가 있었지만, 모 기업에서 운영하는 승마장이 들어서며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고봉 119안전센터 건너편의 한 추모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능선길로 올라가 묘소의 뒤편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해야 했다.
 

후학들이 세운 일석 이희승 선생 추모비.


후학들이 세운 추모비만이 묘소 지켜

묘역에는 이희승 박사의 묘와 그의 부친 이종식 선생의 묘가 아래위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둘 다 부부 합장묘다. 이희승 박사의 묘비에는 ‘문학박사 일석 전의 이공 희승지묘’와 ‘부인 경주 이씨 정옥 부좌’라고 적혀있다. 묘비 뒷면에는 그의 생몰일과 학력, 경력과 업적 등이 간결하게 기록됐다. 또한 무덤을 조성할 당시의 행정구역명은 고양군 벽제읍 문봉리였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명절을 앞둔 때여서인지 봉분과 주변은 말끔히 벌초가 됐다.

묘소 왼쪽에는 그의 제자들이 세운 ‘일석 이희승 선생 추모비’라는 작은 돌비석이 서 있다. 추모비는 선생의 사후 3년이 되던 해인 1992년 일석선생 추모회 이름으로 세워졌고, 문하생 장신항이 글을 짓고 정양완이 글씨를 썼다. 내용을 읽어보면 일석 선생을 기리는 후학들의 애도와 존경의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다.

“여기 겨레의 스승이요 지사이신 한 어른께서 고이 누워계시다. 경술국치 이래 세상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선생은 그 꼿꼿한 지조로 백년을 하루와 같이 겨레의 사표이셨다…(중략) 국어학 연구의 길에 선도자로서 등불을 비추셨으니 특히 그 문법론은 사학의 우뚝한 한 봉우리였고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어대사전을 엮어 펴내는 한편 시작과 수필로 뛰어난 문재를 드러내기도 하였다…(중략) 선생은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정재로 장학사업과 학회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워 따르는 제자가 줄을 이었다…(후략)”
 

이희승 선생 묘소 뒤편으로 그의 부친의 묘가 보인다.


조선어학회 활동하며 우리말ㆍ글 지켜

국문학의 초석을 세운 대 학자로 추앙받는 일석 이희승 선생.

추모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거치며 수많은 위인들이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행적을 보인 경우가 적잖지만,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흠결을 찾을 수 없는 삶이 이어진다.

1896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의왕시 포일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성제국대학에 조선어학과가 생기자 뒤늦게 다시 학업을 시작해 1930년 두 번째 졸업생이 된다. 현대적 학문체계로 공부를 한 최초의 국어학자가 바로 일석 이희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시경 선생이 이끄는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간사장(대표간사)을 역임하며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사정’을 연이어 완성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다.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어학을 가르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돼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는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며 우리나라 국어학연구의 초석을 놓는다. 이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피선됐고, 1960년대 초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언론활동도 펼쳤다. 서울대에서 퇴임한 후 대구대학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했고, 1970년대에는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건국훈장 국민장, 학술원 공로상 등 수훈 이력도 풍성하다.

문법체계 초석, 『국어대사전』 편찬

이희승 선생이 편찬한 『국어대사전』.

이희승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한글의 문법체계를 정리한 것과 국어대사전을 편찬한 것이다. 해방 후 선생이 출간한 『한글맞춤법강의』는 조선어학회 시절부터 가다듬어 온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이후 교과서 문법체계의 표준이 된다. 그는 외솔 최현배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법체계의 2대 계열을 형성했다고 평가받는다.

서울대 교수 정년퇴임 후에는 10여 년 간의 어휘 연구를 집대성해 비로소 『국어대사전』을 세상에 선보인다. 그의 사전은 지금까지도 국어사전의 바이블과 같은 위상을 지키고 있다.

또한 이희승 선생은 『벙어리 냉가슴』, 『소경의 잠꼬대』 등 아름다운 언어 감각을 보여주는 여러 권의 수필집과 『박꽃』, 『심장의 파편』 등의 시집을 남겼다. 평론가들은 선생의 문학세계를 아우르는 태도를 ‘해학과 비판 정신’으로 요약하곤 한다. 인간을 향한 따듯한 시선을 품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날선 비판의식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저서와 논문, 그리고 문학작품은 사후에 후학들에 의해 총 9권의 『일석 이희승 전집』으로 묶여 출간됐다.

학술재단·기념공원으로 고인 뜻 기려

이희승 선생은 학문적 업적과 더불어 높은 인격으로도 세인들의 추앙을 받는다.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이라는 회고록 제목처럼, 그는 지조와 자존심을 소중히 여기는 선비로서의 엄격함을 스스로의 신조로 삼았다. 그는 일제와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등 부당한 권력 일체를 비판하고, 일관된 태도로 저항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인이나 제자들에게는 따듯한 인품으로 해학을 주고받으며 세상과 조화롭게 어울렸던 어르신으로 기억된다. 특히 만년에 단국대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으로 추대되는 과정에서 학교측이 제시한 대우가 터무니없이 많다며 스스로 급여를 대폭 삭감한 일화는 두고두고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현재 이희승 선생을 추모하는 일은 제자들과 후손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일석학술재단이 주로 진행하고 있다. 재단에서는 매 년 국어학 연구에 업적을 남긴 이들을 선정해 ‘일석국어학상’을 수여한다.

또한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의왕시에는 백운호수를 끼고 이어진 한글둘레길과 갈미한글공원을 조성해 일석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서울에도 일석 선생을 기리는 기념물을 찾아볼 수 있다. 남산 북쪽 필동에 조성된 한옥마을에 ‘일석 이희승 선생 학덕 추모비’가 서 있어 그의 업적과 생애를 기념하고 있다.

묘소, 고양의 문화 자산 가치 높아

이렇듯 일석 선생은 학문과 삶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집안의 선산이 있는 고양시 문봉동에 잠들었지만, 정작 고양시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움직임이 전무하다.

그의 묘소를 안내한 김득환 소장은 “문봉동 토박이인 부친이 1989년 일석 선생의 장례 때 마을 일꾼들과 함께 산역을 주도했다”며 이희승 선생과의 인연을 밝혔다. 가끔씩 홀로 일석 선생의 묘소를 찾곤 한다는 김 소장은 “거창한 행사가 아니더라도, 일석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의 움직임이 고양에서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향토사학자인 최경순 선생(고양공양왕고릉제 제전위원장)은 “이희승 선생보다 조금 앞서 우리말을 연구한 국어학자 장지영 선생(조선어학회 제6대 이사장)의 묘도 고양시 선유동에 자리하고 있다”면서 “국어학의 큰 스승 두 분이 지척의 거리에 잠들어 계시다는 것은 지역의 커다란 문화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고양시 역사탐방 문화를 정착시킨 주인공이기도 한 최경순 선생은 “고양누리길 코스를 걸으며 두 분의 묘를 들른다면 좋은 스토리텔링 소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석 선생의 묘가 지정문화재로 등재되기는 어렵다. 묘소의 경우 사후 50년이 지나야 등재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은 “일석 선생의 묘가 시기나 양식 면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지는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인물의 행적과 문화적 의의는 탁월하기 때문에 향토적 문화자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의견을 표했다.

<비문 번역 자문=최경순>
 

이희승 선생의 묘소를 안내한 김득환 서삼릉태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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