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세대마다 다르지만, 우리 때만 해도 삶을 지배하는 의식구조가 대체로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자리 잡았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입시 중심의 교육을 받고 대학에 들어간지라, 새내기답게 자부심은 크고 미래에 대한 낙관은 있더라도, 자기만의 독자적인 사유의 깊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달은 선배 때문에 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책 한권을 슬쩍 밀어준다. 척 봐도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여러 해 걸쳐 여러 사람이 읽은 티가 확 난다. 밑줄도 다른 색깔로 처져 있고, 휘갈긴 메모의 필체도 다르다. 그 위에 내가 밑줄을 긋고, 영글지 못한 필체로 단상을 적었다. 아마도 그 책은 다음 학번의 그 누군가에게로 전해졌을 터다. 그런 과정에서 눈을 가렸던 비늘이 뜯겨나가는, 일종의 개안을 경험했다.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아킬레스건이었다. 진실을 알지 못했고 풍문만 무성했다. 그러다 객관적 사실을 깨달으며 분노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톺아보았다. 또 하나는 분단의 원인과 그 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정말, 큰 공부는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선배들이 건넨 책 가운데 겹치는 소설이 있었다. 하나는 국문과 선배들이 독서력 부족한 후배에게 주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운동권이라 불린 선배가 조심스레 건넨 소설이었다. 최인훈의 『광장』. 이미 가로쓰기 책에 익숙했는데 세로쓰기로 된 소설이었다. 국문과 선배들은 『광장』에 이어 한권 더 소개해 주었다. 『회색인』. 최인훈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문학과 사회(학)의 공통분모로 말이다. 이명준의 고민이나 독고준의 방황은 지식인적 삶을 동경한 한 문학청년에게는 불도장과 같았다. 때로는 결연한 행동만이 옳다고 나대다가도, 여전히 풀지 못한 철학적 난제에 더 골몰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회색인의 삶을 사는 셈이다.

한동안 최인훈 작가를 잊었다. 그러다 발표 당시 읽다만 『화두』를 꺼내 완독했다. 나에게는 매우 사적인 추도의 행동이었다. 작가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고, 내 젊은 날을 장악했던 한 작가에게 바치는 자그마한 헌사라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 고양시의 한 도서관에서 시민과 함께 작품 읽는 강의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고민하다 최인훈의 대표작을 함께 읽는 프로그램을 짰다. 일반인에게 쉽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말로 설명하기에는 강의자에게 부담이 많은 작품이어서 고심했더랬다. 그럼에도 작가가 화정에서 20년 남짓 사셨다는 점, 종전선언이 운위되는 시점에서 최인훈의 문학은 재조명받아 마땅하다 여겼다.

강의 시작하기 며칠 전 사서 선생한테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강의에 최인훈 선생님의 아들과 며느리가 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연히 작년에 최인훈 선생의 아드님이 무엇 하느냐고 물었더니, 클래식 평론가로 활동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만날 인연이라 궁금해 한 모양이라 여겼다. 꽤 부담스런 강의를 마치고 아드님 내외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100만 행복도시, 600년 문화도시’라 하지만, 제대로 된 작가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에 생각이 이르렀다. 얼마 전 근대문학관을 유치하려고 여러 지자체가 과당경쟁을 벌인 일화도 떠올랐다. 고양시에, 그것도 최인훈 선생이 오랫동안 산 화정에 기념도서관을 하나 세우면 어떨까 싶었다.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의 기념관은 많다. 그러나 그이만 기념하는 건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민이 자유롭게 그리고 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되, 그 작가를 기념하는 전시와 프로그램이 상시 운영되는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 이번 고양시장은 우리동네를 평화경제특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호언했다. 그 캐치프레이즈에 딴죽 걸 생각은 없다. 그런데 경제에 문화가 붙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잔소리는 하고 싶다. 분단문학의 상징이라 평가받는 최인훈 기념도서관 정도는 세워보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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