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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종점, 원릉역… 시인이 남긴 ‘원당 시절’의 흔적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8.10.12 12:25
  • 호수 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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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별세한 고 허수경 시인
젊은 시절 원당에 머물며 쓴 작품들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에 담겨

 

허수경 시인이 남긴 시집 『혼자 가는 먼 집』과 에세이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고양신문] 독일에 머물던 허수경(54세) 시인이 지난 3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80년대 후반 등단해 특유의 감성을 담은 시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문단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훌쩍 독일로 떠난 허 시인은 근동고고학을 연구하면서 꾸준히 우리말로 시를 발표해왔다.

시인은 잠시 원당에 머물며 고양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최근 재발간한 산문집 표지 안쪽에 적힌 이력에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허 시인은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이 1992년이니 국내에서 시인으로 활동한 기간은 겨우 6년 남짓이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허 시인은 청춘의 열망과 상실을 담은 문학적 감성을 집약적으로 표출했고, 그것들은 아름다운 시편으로 남아 영원히 독자들 곁에 남게 됐다. 일찍 치러버린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며 시인은 원당에 거처를 삼았던 시절의 마음 풍경도 작품 속에 숨겨두었다.

시인이 남긴 원당의 흔적을 찾아낸 눈 밝은 독자는 향토 역사 지킴이인 최경순씨(고양공양왕고릉제 제전위원장)다. 그는 허수경 시인이 1992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에 실린 ‘기차는 간다’라는 짧은 시의 배경이 바로 원당과 서울 신촌을 잇는 교외선 원릉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인은 기차가 떠나가고 밤꽃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운 것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시 구절을 마음에 품고 원릉역을 찾아가보니, 역사는 쓸쓸한 폐역이 됐지만 두 그루 밤나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경순씨는 “원릉역 건너편, 널따란 논이었을 자리에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서 시 속에 담긴 감흥을 느끼기엔 아쉽다”고 말했다.
 

지금은 폐역이 된 교외선 원릉역 마당에는 두 그루의 밤나무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같은 시집에 실린 ‘원당 가는 길’ 이라는 시도 눈에 띈다. 시는 ‘757 좌석버스, 세간의 바퀴가 나를 그곳까지 데려다주었다’라는 문장으로 첫 연을 시작하고 ‘눈에서 지워진 그 길 원당 가는 길이었던/ 내 삶이 무너지는, 자취 없는 길’이라는 문장으로 마지막 연을 마무리한다. 757 좌석버스 종점이 있던 자리는 지금 커다란 중화요리 식당과 건축자재상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불우한 악기’라는 시에는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이 무대가 되어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라는 문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마도 불광동에서 원당으로 넘어오는 중간에 자리한 서삼릉을 말한 것일게다.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시골에서 올라와 방송국 일로 밥벌이를 하던 허 시인은 월세가 저렴한 방을 찾아 서울 변두리인 원당에 잠시 거처를 얻었던 것 같다. 당시 고양군의 중심이었던 원당은 1980년대부터 저층 아파트와 연립주택, 빌라가 들어서며 서울 인구를 지속적으로 유입하던 동네였다. 특히 원릉역과 757 종점이 가까이에 있는 우일시장 부근은 고양군 최초의 계획시가지로 불리며 주택과 상가가 밀집되고 있었다. 그곳 어딘가에서 허 시인은 757 좌석버스를 타고 불광동으로 나가거나, 원릉역에서 교외선 열차를 타고 신촌을 왕래하며 생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허 시인의 작품을 일관하는 정서는 떠남과 그리움이다. 시인은 “『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시인은 세상과의 이별을 예감한 듯, 지난 8월 자신의 삶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담아낸 산문집의 개정판을 년 만에 출간하면서 책 제목을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로 다시 지었다.

피안의 세계로 떠난 시인이 지상에 남겨두고 간 말들의 자취를 따라 원당의 오랜 골목길을 걷는다. 밤꽃향기 흩날리는 바람결 따라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가는 기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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