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인의 정신의학칼럼> 만성우울증

[고양신문] ‘멘붕’이라는 말이 한 때 화제가 되더니 최근에는 ‘유리 멘탈’, ‘쿠크다스 멘탈’이라는 말이 새로이 유행하고 있다. 별일 아닌 일에도 유리처럼 깨지고, 쿠크다스라는 과자처럼 바스라지기 쉬운 정신이라는 뜻이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점차 정신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우리네 삶을 반영하는 듯하다.

사실 이러한 정신적 취약성에 대해 설명해주는 이론이 있다. 바로 만성우울증에 대한 이론이다. 급성 우울증은 우울감을 주증상으로 하는 ‘감정’의 우울증으로 볼 수 있다. 불안초조가 심하고, 불면, 식욕 부진 등의 신체 증상이 동반돼 우울증 여부가 비교적 명확하다. 반면에 만성우울증은 감정보다는 ‘신체’의 우울증이자 ‘생각’의 우울증에 가깝다. 정서적으로 가라앉아 있기는 하나 특별히 우울한 것은 아니며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우울하지도 않고 수면이나 입맛에 특별한 변화도 없기에 스스로는 우울증이라는 자각은 없고,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개선에 대한 기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간다.

하지만 만성적 무기력으로 사소한 일에도 의욕이 떨어져 삶은 늘 힘겹고 버겁다. 삶에 대한 애착도 약해져 내일 갑자기 죽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만성우울증의 또 다른 특징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유리 멘탈’이다. 때로는 사소한 일에도 상당한 정신적 고통이 엄습한다. 급성우울증에서의 직관적 우울감과는 달리 만성 우울증에서의 이러한 정신적 폭풍우는 상당히 복합적이다. 신체적으로는 목이나 가슴의 압박, 숨쉬기 힘든 느낌, 가슴에 아리거나 시린 것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신체적 불쾌감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정서적 감각은 더욱 설명이 난해하며 이를 표현해주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조차 어렵다. 고통스러움 자체라는 느낌과 함께 숨거나 피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꿈쩍도 할 수 없는 느낌에 가깝다. 따라서 ‘고통이라는 감각에 대한 무력감의 연속’이 적절한 표현인 것처럼 생각된다. 생각의 측면에서는 주체하기 힘든 부정적 사고들이 쉴 틈 없이 자신을 공격하며 순간적인 위축감, 정신적으로 위약해진다는 느낌, 혼란스러움 등이 동반된다.

위에 설명한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 요소들은 마치 해일처럼 갑자기 한꺼번에 몰아치며 또 어느 순간에 사라진다. 반면에 이에 대한 어떠한 대처도 종국에는 반복되어 실패하며 개인은 더욱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없는 무기력감과 간헐적으로 마음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일이 반복되지만 이의 개선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태가 바로 만성우울증의 본 얼굴이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이론이 있다. 바로 인지행동치료 이론의 ‘자동적 사고’이다. 자동적 사고란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자동적으로 펼쳐지는 순간적인 생각들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러한 자동적 사고가 우리의 감정이나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상황에 대해 전혀 다른 정서를 경험하는 이면에는 자동적 사고가 있는 것으로 본다.

개를 우울증에 빠뜨리기 위한 동물 실험 모델이 이러한 자동적 사고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이다. 개를 철창에 가둔 뒤 전기 충격을 반복하여 주면 개는 전기 충격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하지만 전기자극이 반복되며 무력해진 개는 결국 전기 충격을 가하여도 꼼짝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철창문을 열어 놓아 도망칠 수 있게 해놓아도 여전히 개는 꼼짝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자동적 사고이다. 전기 충격을 반복적으로 받은 개는 몸의 통증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을 것이며, 어떤 생각을 떠올리며 정서적으로 압도된 상태가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코 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감이자 무력감일 것이다.

만성우울증의 얼개 역시 이와 거의 유사하다. 개에게 가해졌던 간헐적 전기 자극처럼 만성우울증에서는 특정한 무력감과 정신적 고통감이 반복되며 이의 개선을 위해 최선의 시도가 반복하여 실패하며 보다 깊은 좌절과 고통, 무력감에 이른 상태가 된다. 일종의 악순환인 셈이다.

만성우울증 환자의 경우 게으르고, 매사를 미루며,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인다. 무기력감이 심하여 게을러 보이고, 불안이 충분히 높아지기 전에는 행동이 되지 않아 미루는 양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또 내 마음이 어느 순간에 어떤 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가할지 자신의 마음을 신뢰할 수 없어 삶의 문제에 대해 우유부단해지고 결정하기 힘들 뿐이다.

설경인 연세가산숲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증상’일 뿐 결코 ‘성격’이 아니다. 만성우울증 회복의 과정은 ‘성격’이라고 믿어왔던 부분들이 사실은 ‘증상’이었음을 경험하며, 정신적, 영적으로 자유스러움과 해방감을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성우울증의 증상, 즉 무력감과 정신적 고통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전기자극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개의 사례처럼 역설적으로 더 깊은 좌절감이나 무력감으로 연결되기 쉽다. 애초에 노력으로 좋아지는 증상이 아니었다. 위의 증상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전문기관에서 치료와 상담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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