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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무슨 꿈길 같기만 하네”고양의 새 이웃 - 허형만 시인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8.10.26 14:41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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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의 시집 낸 원로 서정시인
‘동전 한 닢’ ‘녹을 닦으며’ 등 교과서에 담겨

‘사람 냄새 가득한 골목길과 원당시장’
2년 전 원당으로 이사, 일상이 행복

 


[고양신문] 지난해 12월,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에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의 거닐며’의 한 소절이 걸렸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한해 전 촛불광장이 펼쳐졌던 그곳에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겨울 들판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행인들은 냉랭한 일상을 견뎌 낼 든든한 용기를 얻었다. 허 시인의 메시지는 겨울을 꼬박 지키며 올해 2월까지 광화문 네거리를 지켰다.

허형만 시인(74세)은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1973년 『월간문학』에서 시로, 1978년 『아동문예』에서 동시로 등단했다. 이후 쉼 없이 시작을 지속하며 『청명』, 『풀잎이 하나님에게』, 『비 잠시 그친 뒤』 등 모두 17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밖에 평론집, 연구서, 수필집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한국예술상, 월간문학 동리상, 영랑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 동시 ‘동전 한 닢’이,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시 ‘녹을 닦으며’가 수록되기도 했다.

허형만 시인이 지난 15일 일산동구청에서 열린 고양포럼 강사로 초청돼 ‘세상을 살아가는 힘, 연대의식’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고양작가회의 주최 원로작가 초청 평화통일문학강연을 겸한 이 자리에서 허 시인이 “2년 전부터 원당에 살고 있다”고 밝히자 청중들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의 기색이 돌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의 결을 매만지며 서정문학의 계보를 잇고 있는 이가 고양의 이웃이었구나!

반가운 마음은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노 시인의 깊은 성찰도 엿듣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고양에서의 일상이 궁금해 만남을 청했다. 허 시인은 화정도서관을 약속장소로 잡았다. 도서관 뒤편 공원에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한창 가을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영감이 시의 출발점

도서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은 후 광화문글판에 걸렸던 ‘겨울 들판을 거닐며’에 대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열자, 허 시인은 덕분에 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아 무척 감사하다고 말했다. “1999년에 쓴 작품인데, 20여 년 가까이 낭송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애송되다가 광화문에 내걸리며 다시 조명을 받게 됐지요.”

좋은 시를 알아보는 눈은 비슷한 법일까. 허 시인의 작품은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들과 만났다. 우리시대의 소리꾼 장사익은 허형만 시인의 작품 ‘파도’와 ‘아버지’에 가락을 붙여 심금을 울리는 명곡을 탄생시켰다. 그런가 하면 ‘뒷굽’이라는 시는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적혀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허 시인의 시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의 시는 난해함이나 딱딱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순간을 시적 영감의 출발점으로 삼지만, 그러면서도 삶과 존재에 대한 깊은 생각을 담아낸다.

“지하철역에 걸린 ‘뒷굽’이라는 시는 구두 뒷굽이 닮아 수선집에 들렀다가 건진 시예요. 한쪽으로 심하게 닮아버린 제 구두 뒷굽을 보고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게 아니겠어요? 그 한 마디가 상상을 자극했어요. ‘참 오래도 사셨네요’로도 들리고,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로도 들리더군요.“

‘기울어진다’는 말에서 시인은 ‘좌빨과 우빨’을 떠올렸고, 결국에는 둥그런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 나아가 모든 존재의 숙명적 한계에 대한 성찰까지 끌어냈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게 아닌지/ 순수 영혼이 한 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이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시 ‘뒷굽’ 일부)
 


■ “세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책과 같다”

허 시인은 대학을 졸업한 후 광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시절에 광주민주항쟁을 눈앞에서 겪었다. 젊은 허 시인 역시 피가 끓고 주먹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절의 대다수 문인들처럼 칼과 피, 군홧발, 총구 등의 시어로 작품을 쓸 수는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현실과 서정, 그리고 시의 관계를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보이며 기자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시는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단한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 옮겨서는 곤란합니다. 단단한 커피가 잘게 부서져 뜨거운 물에 녹아내려 향기로운 커피가 되듯, 단단한 현실이 따뜻한 정서를 통과해 시가 돼야 한다는 게 나의 입장입니다.”

시대와 서정을 함께 품으려는 허형만 시인의 문학적 치열함은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를 통과하며 ‘풀잎이 하나님에게’, ‘녹을 닦으며’와 같은 작품을 낳았다. 생명과 평화를 갈구하는 민중들을 연약하지만 희망을 꺾지 않는 풀잎에 비유한 ‘풀잎이 하나님에게’는 당시 민주화운동 대열에 동참했던 교회에서 애송되기도 했다고 한다.

‘…야훼 우리 하나님, 태풍이 몰아쳐도 뿌리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불이 번져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시 ‘풀잎이 하나님에게’ 일부)

광주에서의 고교 교사시절을 마치고 허형만 시인은 목포대학교 국문과에서 30년 간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몇 해 전 정년퇴임했다. 그 세월동안 그에게 배움을 얻어 문단에 등단한 제자들이 꼽을 수 없이 많지만, 허 시인은 한사코 “나는 제자를 가르치거나 키운 적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나에게는 제자가 없습니다. 다만 같이 공부를 하는 벗들이 있을 뿐이지 누가 누굴 가르친단 말입니까. 원당에 온 후 화정도서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시를 쓰고 싶은 이들과 만나는데, 이 양반들 역시 사제관계가 아닙니다. 다 함께 시를 써서 서로 돌려보고, 제가 좀 더 오래 공부를 했으니까 몇 마디 의견을 들려주는 것뿐입니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허형만 시인은 세상의 작고 미미한 것에게도 동등한 존재의 무게를 존중한다. 그는 “온 세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책과 같다”고 말한다. 세상은 눈을 뜨고 있는 이에게 자신의 넉넉함을 아낌없이 드러내 보이는 신비로움이라는 것. 그는 캐나다 여행 중 오래된 성당 마당에서 한 송이 양귀비꽃을 만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이 곳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별빛과 안개를 털어냈을까/ 몇 광년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냈을까…사랑이여/ 잠시나마 그대와 함께 있기 위하여/ 칠십 평생이 걸렸구나’(시 ‘양귀비꽃’ 일부)
 


■ 원당의 골목길 거니는 일상이 행복하다

앞서 말했듯 허형만 시인은 2년 전 원당으로 이사를 왔다. 인연의 이끌림에 따라 시심이 한껏 무르익은 생의 만년에 비로소 고양과 ‘만난’ 것이다. 새로 살 집을 택하려고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성사고등학교 옆 한 아파트로 낙점했다는 그는 “원당으로 이사 오기를 참 잘 했다”고 말한다.

“원당은 ‘으뜸가는 집’이라는 뜻이잖아요. 이름처럼 따뜻하고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겨울 눈이 내렸는데, 풍경이 참 아름답더군요. 그래서 누군가가 내 닉네임을 묻길래 ‘설원당’이라고 말해줬지요. 원당 뿐 아니라 이웃한 성사는 별모래, 화정은 꽃우물, 하나같이 이름이 참 이뻐요.”

허 시인은 문우들을 만나러 서울에 나갈 때 집에서 원당역까지 천천히 걸어가곤 한단다. 골목길이 아직 남아있고, 사람 냄새 가득한 원당시장의 북적임도 정겹다고 한다. 일요일이면 원당시장 옆 성당에 나가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최근에는 마을 이곳저곳을 일부러 둘러보기도 합니다. 골목길을 따라 고양시청을 찾아가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100만 도시의 시청이 세상에 이렇게 초라하다니(웃음). 하지만 사실은 참 아늑하고 정감이 가 맘에 들었습니다. 정문 바로 앞에 ‘고양신문’이라는 간판도 보고 왔지요(웃음).”

그의 눈에 비친 원당의 풍경, 고양에서의 일상들은 어느 새 허 시인의 감성 필터를 통과하며 새로운 시들로 태어나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막차 시간 지하철에서 곰탕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있는 노년신사를 보고는 ‘…저 분도 원당 역에서 내렸음 좋겠다/ 함께 내려 허름한 소줏집으로 모시고 가/ 홀짝, 한 잔 하고 싶다’(‘지하철 안에서’)고 중얼거려보기도 하고, 원당시장을 거닐다 누에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는 ‘…와, 시장이 환해져!…흠흠, 시장이 향긋해!’(‘누에’)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한다.

허 시인을 만난 다음날, 기자에게 한 편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거기에는 허 시인이 원당으로 이사온 후 쓴 미발표작 시 한편이 담겨있었다. 많이 반갑고 감사했다. 작은 만남을 귀하게 여기는 노 시인의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늘상 무감동하게 머무는 동네를 새로운 시선과 가치로 바라보게 해 준 한 편의 시 때문이기도 했다. 고양신문 지면을 통해 처음 발표되는 시 ‘원당’은 고양의 모든 이웃들에게 건네는 허형만 시인의 따뜻한 인사이리라.

 

원당(元堂)

                                        허형만


오늘도 서울특별시를 가로지르는 지하철을 타고
원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슨 꿈길 같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원당
원래부터 사람 살기 좋다는 원당에 터 잡은 사람들은
전에는 골짜기였던 큰길 아래 언덕배기에서
몰려오는 설한풍 깊은 눈보라 겨울에도
쓸쓸했던 시간의 세월만큼 오히려 다사롭겠네
대기업 백화점이나 마트는 없지만
먼 곳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전통시장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보글보글 피어오르고
시장 옆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가
윤슬처럼 반짝반짝 거리를 밝히는 주일이면
거리마다 가난한 마음들이 은총으로 부풀어 오르겠네
멀리 출타했다가 원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늘 무슨 꿈길 같기만 하네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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