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태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화재안전연구소장

이태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화재안전연구소 소장

[고양신문] 계절은 바야흐로 만추(晩秋)를 향해 달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계절이 제일 좋다. 더위를 많이 타는 탓으로 돌리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수확과 결실에 따른 풍요와 성취를 느낄 수 있는 반면, 지고 떨어짐에 따른 상실과 고독을 앞두고 있기에 많은 생각이 스쳐가는 시기다. 도시의 나무들도 이미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잠깐만 길을 나서면 가로수와 주변의 다양한 나무들이 베풀어주는 깊은 가을의 향연을 쉽게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오늘도 만추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휴일이라서 인적이 없는 연구원 캠퍼스는 형형색색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울타리 밖으로 통하는 쪽문을 지나 공원쪽으로 가다 보니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 지나가는 자동차를 따라가려는 듯 휘날린다. 이내 공원에 들어서자 큰 스피커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관내 한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가 한창이다. 좋은 계절을 맞아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뽐내는 운동경기를 하는 거야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공원 입구에는 평화의 시작, 미래의 중심 고양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지자체 산하 공사에서 내건 현수막이 눈에 띈다. ‘주말 토‧일 19시~23시에는 가족과 함께 놀아요~ 동호인팀 축구경기 no! no! 아이들에게 양보 oh! yes!’

오죽 동호인들이 공원을 독차지하면 이런 현수막까지 내걸었을까. 휴일 저녁 이후 늦은 시간만이라도 지역주민과 아이들에게 양보하라니, 이외의 시간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 동네 근린체육공원의 모습이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이들 공원은 지역 주민들이 산책이나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작고 아담한 시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높은 철망이 쳐진 넓은 축구장이 중심에 있고 주변에 농구장이나 테니스장, 그리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시설들이 있는 경우가 많다. 외지의 동호인들이나 그 밖의 단체는 미리 예약해 축구장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용자가 몰리면 추첨을 한다는 얘기도 있다. 테니스장은 주로 강습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인근 지역주민들은 외지인들이 활개 치며 뛰고 달리는 축구장 외곽을 따라 난 좁고 울퉁불퉁한 트랙을 걷거나 뛰는 게 전부다. 바로 옆의 확 트이고 밝은 야간 조명시설이 비추고 있는 인조 잔디 축구장 시설에 비하면 관리상태도 그저 그렇다. 또 근린시설이라는 취지에 따라 주차시설도 없어 외지 동호인들의 주차로 몸살을 앓는 게 다반사다. 공터나 식당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단속을 하겠다는 현수막도 내걸려 있다. 그야말로 근린시설이라 하기가 무색할 정도다.

몇 주 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화합 풍물시장이 열렸다. 소매상인들이 단지 내에 좌판을 벌여 주민을 상대로 물건을 사고파는 것으로 주민화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주차시설도 빈약해 위험하기 짝이 없어 투표에서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시장은 열렸다. 주민화합을 위한 행사를 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반증이다. 단지 내 주민이 어우러지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지역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풍물시장이나 소통을 위한 행사를 위한 공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근린체육공원은 인근 지역주민의 품으로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 같이 모여서 어울릴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 지자체에서는 노인들, 주부들, 직장인들, 청소년들 그리고 어린이들이 같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고민해야 한다. 지역의 문제와 공통의 관심사를 논할 수 있는 장을 통해 살맛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주로 외지인들로 구성되는 동호회원들의 친목과 교류를 위한 시설은 도시 외곽에 그에 맞는 용도로 따로 만들어 주는 게 마땅하다.

근린체육공원과 같은 시설을 알차게 이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이들 시설은 주로 인근 주민이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접근성이 편리한 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이런 곳은 인근 지역을 지원하는 각종 시설의 입지로도 제격이다. 예를 들어 도시생활에 필수적인 시설로, 해당 지역에 물과 에너지를 공급하고 재이용하는 중계시설을 공원의 지하에 둘 수 있다. 또 주민센터나 대피시설은 물론, 수영장과 식물원 등 주민 편의시설을 지원하며 같이 운영할 수도 있다.

우리의 도시는 너무 거시적으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의 사고는 여전히 중앙집중식이다. 지역주민 스스로 참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의 지원을 통해 시도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자치단체가 생각을 바꿔 적극 나서야 한다. 그 시작은 근린체육공원의 탈바꿈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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