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펴낸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펴낸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금정굴 사건만을 집중 종합해 다뤄
학살에 대한 형사사건 기록 첫 공개
검찰조사에선 양민, 이후엔 빨갱이
“권력유지 위한 이중적 태도”

[고양신문]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신기철씨가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을 펴냈다. 그의 일곱 번째 책이다.

그에게 있어 이번 책은 더욱 특별하다. 지금까지 고양지역에서 금정굴을 중심으로 민간인 학살을 연구·저술해 왔는데 드디어 금정굴 사건만을 종합해서 다룬 책을 출간한 것. 분량은 864쪽, 웬만한 백과사전 두께다. 그가 지금까지 쓴 책 중에는 600쪽 분량도 있었지만 이번 책은 페이지 수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도, 조사한 내용도 많았다.

책에는 금정굴 학살의 역사적 배경, 고양지역의 또 다른 민간인 학살사건을 포함하면 이 지역에서만 총 836명이 희생당했다는 내용,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전문, 유족들과의 인터뷰, 진상조사를 위한 활동내용(청원서·진정서 원문), 200여 명으로 추정되는 금정굴 희생자의 명단과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 국가가 발표한 피살자 명부, 확인되는 가해자 명단 등이 수록돼 있다. 특히 학살에 대한 형사사건 기록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제목은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이다. 책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난 6일 신기철 소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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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굴 사건에 대해 소개해 달라.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남한 전역이 인민군에 점령당하지만 국군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포함한 경기지역을 3개월 만에 탈환한다. 하지만 그 3개월 동안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많은 민간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경찰과 군인에게 희생당한다. 고양시에서는 그해 10월 황룡산(고봉산 삼거리 인근)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황룡산 자락 정상에는 ‘금광굴’, ‘금정굴’, ‘황금구덩이’라 불리는 깊이 50m의 수직 금광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곳에서 부역혐의자의 가족 2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총살·암매장 당했다.


▪ 금정굴 사건 진실규명의 의미는.

금정굴 유해 발굴을 통해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실체가 최초로 알려졌다. 1993년 유족회와 시민단체를 통해 사건 현장에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골뿐 아니라 옷과 신발 등 유물 860점도 함께 발굴됐다. 금정굴 발굴 이후에서야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동안은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는 것이 공식적인 국가의 입장이었다.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최초의 사건이다.

그의 일곱 번째 책은 '고양 금정굴 사건'만을 종합해서 다룬 유일한 책이다.


▪ 이번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진 내용은 무엇인가.

금정굴 학살에 대한 형사사건 기록은 처음으로 제대로 분석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건 직후 국가가 학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공식문서를 통해 확인했다. 진상규명을 위한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의 활동들을 종합해 소상히 기록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 금정굴 피해자는 어떤 사람들이었나.

부역혐의자들의 가족이 대부분이다. 혐의자들은 죽음을 피해 몸을 숨겼지만 그 가족들은 집에서 잡혀와 그대로 학살당했다. 가족들의 희생이 95% 정도다.

▪ 재판도 없이 학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이란 이유로 재판을 받은 분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법적으로 처벌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벌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법으로 죽였다. 부역혐의자의 가족은 경찰과 의용단, 태극단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정작 부역혐의자는 재판으로 20년 형을 살고 풀려난 사람도 있다. 

▪ 부역에 대한 증거가 충분했나.

혐의에 대한 증거는 매우 부정확하다. 더군다나 그 가족들은 처벌대상도 아니지 않나. 진술을 받아낸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상황을 정리해 보면 쫓고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부역혐의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부역자들이 죄 없는 사람을 부역자로 몰았다는 증거도 있다. 실제로 가해자 중에는 민청위원장이나 자위대장을 하며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도 있다. 의용경찰대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들이다. 태극단 중에도 민청학생 등에서 부역했던 사람들이 있다. 전쟁 초기 점령과 수복을 반복했던 혼란스러운 3개월 동안은 부역혐의자들이 매우 혼재돼 있었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그 혐의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 국가 기록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떻게 나와 있나.

당시 검찰 기록에는 고양경찰서가 지휘한 금정굴 학살사건이 민청이라는 좌익조직이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변질돼 있다. 피해자가 양민은 맞지만, 가해자가 좌익이라는 것이다. 검찰 조사에서 원래의 학살주체인 경찰은 빠지고 경찰의 지휘를 받았던 민간인 일부가 좌익이 되어 처벌받았다.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했고 은폐 당사자가 당시 검찰이었다.

▪ 왜곡·은폐된 내용이지만 검찰 수사에서 피해자가 ‘양민’으로 표현됐다면 국가도 그 즉시 유족들의 피해를 인정해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조사내용을 그렇게 결론 냈지만, 실제로는 힘들게 살아남은 유족들에게까지 좌익으로 낙인찍고 취업까지 방해했다. 해외에 나가는 것도 금지했다. 법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니깐 그렇게 결론짓고는 또다시 사건을 그들 입맛에 맞게 왜곡한 것이다. 어찌 보면 국가가 ‘이중인격’, ‘정신분열상태’를 보인 것과 같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그 권력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것만 채택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보여주는 단면의 뿌리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1995년 10월 4일 발굴된 금정굴 유골.


▪ 금정굴 피해자 유족들의 삶은 어땠나.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인 분이 없다. 학살 직후 송포동·법곳동은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피해자 가족이 많은 곳이다. 이 동네에선 그나마 서로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하며 과부들끼리 힘들게 버텼다. 지금도 사람들 관계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을 제외한 덕이동과 일산 등 대부분의 지역에선 살아남은 유족들도 마을 사람들로부터 추방됐다.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멸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떠났다. 이것이 사건 직후의 모습이다. 이후에는 연좌제는 그대로 적용돼 예비군대대를 통해 유족들을 감시하고 취업을 하면 경찰이 신원조회를 해서 빨갱이라는 정보를 회사에 흘려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게 했다. 80년대를 넘어가면 신원조회가 그나마 완화됐다고 한다.

▪ 올해 3월 충남 아산에서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가 발굴됐다.

경찰과 우익이 학살한 희생자들의 유해 208구가 수습됐다. 그런데 그곳에서 비녀가 89개나 발견됐다. 희생자의 약 90%가 아이, 여성, 노인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사건은 1950년 수복 직후가 아닌 그 다음해 1월 6일 1·4후퇴 때 벌어진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학살사건보다 3개월 뒤에 일어났는데, 여성과 아이가 피해자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전쟁이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사람들 아닌가. 기존의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끔찍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년도에 행한 민간인 학살의 증거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1995년 10월 발굴된 금정굴 유골.


▪ 국가가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독재정권이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정권에 반대할 만한 세력을 철저히 제거한 것이다. 이미 해방 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며, 11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정치범이 됐고, 30만 명의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소집당해 매를 맞아야 했다. 국가에 의한 인권유린은 한국전쟁 중 최고조를 이뤄 전쟁기간 100만 명의 민간인이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금정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얼마 전 관련 조례가 늦었지만 통과됐다. 어떤 방식으로 금정굴이 기억됐으면 하나.

유족들이 원하는 것은 현장에 유해를 안치하는 것이다. 현재 유해는 하늘문 추모공원에, 유물은 충북대 박물과 수장고에 있다. 유골과 유품은 박물관 형태로 현장에 보존하는 것이 맞다. 시민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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