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공백 틈타 걷잡을 수 없이 확산
버드나무숲 곳곳 ‘거대한 갈색 무덤’
환경청 나 몰라라, 시는 속수무책
“이달 24일 대대적 제거활동 펼칠 것”

 

가시박 덩굴에 점령당해 거대한 무덤처럼 변한 장항습지의 버드나무군락.


[고양신문] 선버들과 말똥게가 공생하는 기수역 생태 보고로서 고양시가 람사르 사이트 등재를 추진 중인 장항습지가 생태계를 교란하는 유해식물인 가시박에 점령당하고 있다. 가시박은 어느 새 장항습지 중심부의 버드나무숲까지 침투했다. 생태계 교란종이 장항습지 곳곳에서 서식범위를 넓혀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게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올해 여름 걷잡을 수 없이 가속도가 붙었다는 게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한 생태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지난 15일 기자가 직접 장항습지에 들어가 목격한 실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생태관찰데크를 따라 10여 분 들어가자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하게 솟은 구릉을 갈색의 메마른 풀이 뒤덮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구릉이 아니라 가시박에 점령당한 버드나무였다.

나무둥걸 안으로 들어서보니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어야 할 버드나무에 초록의 기운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촘촘하고 견고하게 버드나무를 덮은 가시박 덩굴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갈색으로 메마른 가시박 고사체를 덮어 쓴 나무둥걸은 마치 커다란 캐노피 텐트를 연상케 했다. 서너 그루가 나란히 가시박의 습격을 받은 버드나무 군락은 공상영화 속 폐허처럼 기괴한 분위기마저 연출했다.
 


도대체 가시박이 어디까지 퍼진 것일까. 물억새와 갈대가 자라는 강가 쪽으로 탐방데크를 따라 좀 더 들어가보니, 가시박은 어느 새 초지에서도 군데군데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 가시박 뿐 아니었다. 수풀을 넓게 뒤덮는 또 다른 생태꼐 교란종인 환삼덩굴도 가시박과 뒤섞여 물가식물들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고양의 생태 보고’라고 입버릇처럼 칭송받곤 하는 장항습지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된 까닭은 뭘까. 복잡한 관리체계가 요인 중 하나일 수 있다. 장항습지 생태보전에 대한 1차적 책임은 한강유역환경청에 있다. 장항습지가 환경부에 의해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받은 한강 하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장항습지는 올해 여름까지 군부대가 관할하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그런 까닭에 장항습지 안에서의 일체의 활동은 군부대의 허가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한강유역환경청과 고양시 환경보호과, 군부대 사이에서 생태관리에 대한 협조와 역할분담이 원활히 이뤄지지 못하는 공백 상태에서 생태계 교란종이 소리 없이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시박의 습격을 받아 말라버린 버드나무. 다음 차례는 뒤편 푸르른 나무일지도 모른다.

환경운동가 박평수(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 공동대표)씨는 “여러 시민단체에서 외래식물, 특히 가시박 확산 차단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강유역환경청과 시 환경보호과에 수차례 건의했지만 실효적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면서 참담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항습지의 생태보전 대책 부재는 자유로변 1차 철책 제거와 함께 지난 7월 말 장항습지 출입을 통제하던 9사단 병력이 철수하면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군 철수가 미리 예견된 절차였음에도 차후 대책에 대해 환경청과 고양시가 여태까지 종합적 관리 매뉴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고양시 환경보호과는 부랴부랴 16일 오전 고양환경운동연합, 에코코리아, 어린이식물연구회 등 장항습지 모니터링 참여 5개 단체 대표들을 소집해 간담회를 열고 생태계 교란종(가시박) 제거와 환경정화활동 계획을 긴급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환경보호과는 “오는 24일 생태 모니터링 단체, 공무원, 자원봉사자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가시박 씨앗 제거 작업을 함께 펼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협조를 약속하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일주일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시민단체에 작업 동참을 요청하는 졸속 추진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으로 가시박의 확산 저지를 위한 행동을 취하기에는 너무도 늦은 시점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에코코리아 이은정 사무처장은 “이미 가시박의 씨가 무르익어 제거작업 과정에서 오히려 확산을 자극할 염려가 있다”면서 “가시박의 싹이 올라오는 5~7월 사이에 선제적 조치가 취해졌더라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잔가시를 가득 달고 있는 가시박 씨앗은 한번 땅에 묻히면 몇 년이고 싹을 틔우고 덩굴을 밀어 올리며 주변을 잠식하는 생태계의 시한폭탄이다.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는 일이지만, 24일 단발성 행사로 진행되는 제거작업이 오래도록 위력을 과시할 시한폭탄들을 과연 얼마나 제거할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게 사실이다.

노승열 시 환경보호과장은 “시 조직개편 과정에서 장항습지 관련 업무를 전담·총괄하는 조직이 신설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내년에는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대책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시박이 뒤덮으면 버드나무는 햇빛을 받지 못해 말라죽는다. 버드나무를 넓게 뒤덮은 가시박의 모양이 캐노피 텐트를 연상케 한다.

 

촘촘한 잔가시를 잔뜩 달고 있는 가시박 씨앗. 한번 땅에 박히면 수년동안 싹을 틔우며 주변 생태계를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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