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나무에 설치한 어느 아파트 입구 트리 전등. <사진제공=김윤용>



[고양신문] 나무를 한자어로 수목이라고 합니다. 나무 수(樹), 나무 목(木)입니다. 몇 년 전 나무 공부를 할 때 ‘수’와 ‘목’은 모두 나무인데 왜 구분하고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한동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책에서 ‘수’와 ‘목’을 구분하는 얘기가 실렸더군요. ‘수’는 살아 있는 나무를 말하는 거고, ‘목’은 죽은 나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요. 인터넷 사전에도 “수(樹)는 자라고 있는 나무, 목(木)은 목재(木材). 산 나무와 죽은 나무의 총칭.”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얘길 보고 그럴싸한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사람들과 어울렸을 때, 한자 어원에 박식한 선배가 자리에 함께해서 ‘수’와 ‘목’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물었습니다. 기둥과 가지와 뿌리를 형상화한 글자라고 설명하더군요. 하지만 좀 더 캐물었더니 잘 모르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제가 책에서 배운 대로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라고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친구가 허약한 논리를 반박하는 한 방을 날렸습니다. 그렇다면 식목일은 뭐냐는 거였지요. 식목일에 죽은 나무를 심는 건 뭔가 수목이란 한자어와 맞지 않는다는 거였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도 얼굴이 약간은 붉어졌겠습니다. ‘수목’을 너무 간단하고 쉽게 판단하고 말한 저로서는 친구가 제기하는 문제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제게 ‘수’와 ‘목’은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수’는 살아 있는 나무, ‘목’은 죽은 나무와 산 나무를 모두 일컫는 말 정도로 대충 이해하고 있습니다.

겨울 날씨가 건조합니다. 사무실 문을 열 때마다 손잡이 잡기가 두렵습니다. 정전기 때문이지요. 온몸을 관통하는 찌릿찌릿한 그 기운이 매우 불쾌합니다. 소름이 돋습니다. 정전기를 피하기 위해 손 등으로 대보기도 하고 옷이나 손수건으로 감싸고 문을 엽니다. 그런 행동을 깜빡 잊으면 정전기가 순식간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퍼집니다. 뇌 세포가 죽는 느낌입니다. 정전기는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잡을 때는 영향이 없는데 쇠로 된 손잡이에서만 심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분들은 정전기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데 내 몸이 약한 것일까요.
 

한 교회 옆 나무에 설치한 화려한 성탄 트리. <사진제공=김윤용>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항상 연말이면 나무를 이용해 성탄 트리 전등을 꾸밉니다. 화려한 온갖 색들이 반짝이는 트리 전등은 어찌 보면 아름답고 멋지게도 보입니다. 호수공원 나무에도 한때는 살아 있는 나무를 이용해 트리 전등을 꾸미기도 했지요. 화려했지만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생명 활동을 최소화하고 낮게 엎드려 지내는 나무에게 전기 고문을 시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수십 가닥 전선줄을 두르고 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나무들이 안쓰러웠습니다. 양계장 닭에게 알을 계속해서 낳게 하기 위해 전등을 밤에도 켜는 것처럼 나무가 쉬는 밤에도 전깃불을 비추는 것은 나무 생태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찌릿찌릿한 약한 정전기에도 우리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나무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자연은 자연스러울수록 좋습니다. 제발 살아 있는 나무에 전등 트리를 더 이상 설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도 올해는 호수공원에 살아 있는 나무에 전등을 감지 않았습니다. 이재준 시장이 공약으로 내세운 ‘나무 권리 선언’ 영향일까요? 제가 사실 확인을 해보진 않았지만, 호수공원 나무에 트리 전선줄이 감기지 않은 것을 보고 새삼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호수공원 풍차도서관에 설치한 전등 장식. <사진제공=김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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